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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역전 드라마: 인간의 공식을 해체하고 비워내신 사랑의 서사시 : 창세기 49, 50장 묵상

하나님의 역전 드라마: 인간의 공식을 해체하고 비워내신 사랑의 서사시 창세기 49-50장 묵상 주님, 제가 주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창세기 49:18, 새번역) 요셉이 자기 친족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창세기 50:24, 새번역)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를 시키면서 일렀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실 날이 온다. 그 때에 너희는 나의 뼈를 이 곳에서 옮겨서, 그리로 가지고 가야 한다." (창세기 50:25, 새번역) 1. 엇갈린 손을 넘어, 인생의 공식을 해체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48장에서 야곱의 '엇갈린 손'은 그의 영적 통찰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이제 49장에 이르러 야곱은 열두 아들에게 축복과 예언을 남기며, 이 '엇갈린 손'의 원리가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관통할 하나님의 섭리임을 확증합니다.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 에서가 아닌 야곱, 르우벤이 아닌 유다(왕권)와 요셉(축복의 중심)에게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선택은, 성서가 인간 사회의 익숙한 장자권이나 논리를 따르지 않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성서는 인생의 선후와 경중이라는 우리의 고정된 시선 대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흐름을 주목하게 합니다. 이러한 인생 공식의 해체는 야곱의 유언 중간에 불현듯 터져 나오는 "주님, 제가 주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49:18)라는 고백 속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아들들의 미래를 내다보며 인간적인 계획이나 힘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구원(예슈아, יְשׁוּעָה)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고백하는 야곱의 외침은, 모든 인간의 단 하나의 간구와 희망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선택과 구원은 인생의 영역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이며, 인간의 모든 가치와 규칙은 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전 앞에서 무력...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 엇갈린 손에 담긴 하늘의 질서 : 창세기 48장 묵상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 엇갈린 손에 담긴 하늘의 질서 창세기 48장 묵상 내가 너를 보려고 여기 이집트로 오기 전에 네가 이집트 땅에서 낳은 두 아이는, 내가 낳은 아들로 삼고 싶다. 르우벤과 시므온이 나의 아들이듯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도 나의 아들이다. (창세기 48:5) 그는 오른손을 펴서, 둘째 아들인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얹고, 왼손은 므낫세의 머리 위에 얹었다. 므낫세가 맏아들이었지만, 그는 이렇게 손을 엇갈리게 얹었다. (창세기 48:14) 그의 아버지는 거절하면서 말하였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겨레를 이루고, 그도 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아우가 그 형보다 더 크게 되고, 그의 자손에게서 여러 겨레가 나올 것이다." (창세기 48:19) 나는 너의 형제들보다 너에게, 내가 나의 칼과 활을 가지고 아모리 사람의 손에서 빼앗은 세겜 땅을 한몫으로 더 준다. (창세기 48:22) 1. 언약의 셈법, 두 배가 된 은혜의 몫 죽음을 앞둔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한 시대를 살아낸 족장의 마지막 언약적 행위입니다. 이 입양을 통해 요셉은 실질적인 장자의 명분, 즉 '두 배의 몫'을 받게 됩니다. 이는 훗날 레위 지파가 하나님을 섬기는 특수 임무를 위해 땅의 기업에서 제외될 때,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는 거룩한 수를 온전히 채우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복선이 됩니다. 인간의 셈법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이 한 가정의 상속 절차를 통해 장엄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2. 엇갈린 손, 본성인가 통찰인가 그리고 운명적인 축복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야곱은 요셉의 제지를 뿌리치고 의도적으로 손을 엇갈려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얹습니다. 이 모습을 보며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평생 둘째로서 장자를 이기려 했던 야곱의 옛 본성이 마지막 순간에 다시 드러난 것일까? "...

안락과의 씨름, 언약을 향한 마지막 절뚝거림 : 창세기 47장 묵상

안락과의 씨름, 언약을 향한 마지막 절뚝거림 창세기 47장 묵상 야곱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창세기 47:9) 야곱이 이집트 땅에서 열일곱 해를 살았으니, 그의 나이가 백마흔일곱 살이었다. 이스라엘은 죽을 날을 앞두고,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놓고 일렀다. "네가 이 아버지에게 효도를 할 생각이 있으면, 너의 손을 나의 다리 사이에 넣고, 네가 인애와 성심으로 나의 뜻을 받들겠다고 나에게 약속하여라. 나를 이집트에 묻지 말아라." (창세기 47:28-29) 1. 순례자의 고백, 험악한 세월 속에 핀 신앙 야곱이 마침내 당대 최고의 권력자 파라오 앞에 섭니다. 그의 첫마디는 자신의 부와 명예에 대한 과시가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 즉 "내 나그네 길의 세월(개역개정)"이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이는 세상의 왕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이 땅에 발붙인 자가 아닌 본향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임을 선포하는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130년의 삶을 "험악한 세월"이라 요약한 것은 단순한 자기 연민이 아닙니다. 속고 속이며, 씨름하고 도망치던 모든 순간이 결국 자신을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연단의 시간이었음을 인정하는 순례자의 깊은 회고입니다. 그의 초라한 행색과 이 고백은 파라오의 화려함과 대비되며, 세상의 권세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는 성도의 존엄을 빛내고 있습니다. 2. 두 번째 씨름, '안락'이라는 이름의 천사 험악했던 130년과 달리 야곱의 마지막 17년은 그의 생애 가장 평온하고 풍요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기근은 그를 비껴갔고,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은 최고의 권력자가 되어 그를 봉양했습니다. 바로 이곳, 모든 것...

거룩한 기억의 땅에서 시작된 여정 : 창세기 46장

거룩한 기억의 땅에서 시작된 여정 창세기 46장 묵상 이스라엘이 식구를 거느리고, 그의 모든 재산을 챙겨서 길을 떠났다. 브엘세바에 이르렀을 때에, 그는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렸다. 그 밤에 하나님이 환상 가운데서 "야곱아, 야곱아!" 하고 이스라엘을 부르셨다. 야곱은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하나님, 곧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거기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고, 반드시 너를 다시 이끌어 내올 것이다. 네가 숨을 거둘 때에는, 요셉이 너의 눈을 직접 감겨 줄 것이다." (창세기 46:1-4, 새번역) 1. 첫걸음, 기억의 땅에 발을 딛다 야곱은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향하는 거대한 여정의 첫걸음을 떼며 길을 멈추어 섭니다. 그가 멈춘 곳은 '브엘세바'였습니다. 창세기의 편집자가 굳이 이 지명을 기록한 데에는 깊은 의도가 있습니다. 브엘세바는 단순한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하나님의 언약을 확인받았던 '거룩한 기억이 축적된 땅'입니다. 불확실한 미래로 떠나는 야곱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깃든 과거, 즉 '회복의 시공간'으로 나아가 하나님께 자신의 여정을 아룁니다. 이는 마치 낯선 곳으로 떠나기 전 부모님의 집에 들러 인사를 올리는 것과 같은 영적 효(孝)의 행위입니다. 우리의 여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미지의 '애굽'으로 발을 뗄 때, 우리는 신앙의 '브엘세바'로 나아가 거기에 축적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되새기며 우리의 발걸음을 그분께 아뢰어야 합니다. 2. 울려 퍼지는 선율, '함께하심'의 약속 거룩한 기억의 땅 위에 마침내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야곱아, 야곱아!" 아담이 두려워 나무 사이...

창세기 45장 : 흉터를 섭리라 부를 때, 구원의 여명

흉터를 섭리라 부를 때, 구원의 여명 창세기 45장 묵상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하고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하니, 그제야 그들이 요셉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 넘긴 그 아우입니다. ...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창세기 45:4, 7-8, 새번역) 1. 가장 먼저 말을 건넨 흉터 요셉은 "내가 요셉입니다"라고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첫마디는 달랐습니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 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팔려 온 자'라는 고통의 역사와 연결하여 소개합니다. 그렇습니다. 상처는 아물어도 흉터는 남습니다. 인간의 기억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한, 쓰라린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기억의 그릇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영광스러운 현재 이전에 형들이 만든 지울 수 없는 상처의 흔적을 먼저 대면합니다. 이것은 원망의 언어가 아닙니다. 용서가 고통의 현실을 외면하는 값싼 망각이 아님을, 그 아픔을 정직하게 직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됨을 보여주는 가장 진솔한 고백입니다. 2. 기억의 재해석이라는 거룩한 결단 그러나 요셉은 그 흉터의 기억에 자신을 가두지 않습니다. 그는 의도적이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기억 그릇에 담긴 과거의 의미를 바꾸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현실 부정이 아닙니다. 형들의 죄악이라는 '사실' 위에 ...

열정 위에 덮인 진정성, 구원의 서막 : 창세기 44장

열정 위에 덮인 진정성, 구원의 서막 창세기 44장 묵상 "요셉이 말하였다. '그렇게까지 할 것은 없소. 이 잔을 가지고 있다가 들킨 그 사람만 나의 종이 되고, 나머지는 평안히 당신들의 아버지께로 돌아가시오.'" (창 44:17, 새번역) "그러니, 저 아이 대신에 소인을 주인 어른의 종으로 삼아 여기에 머물러 있게 해주시고, 저 아이는 그의 형들과 함께 돌려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 아이 없이, 제가 어떻게 아버지의 얼굴을 뵙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의 아버지에게 닥칠 불행을, 제가 차마 볼 수 없습니다." (창 44:33-34, 새번역) 1. 상처 입은 열정의 치밀한 계획 요셉의 계획은 잃어버린 동생과 함께 살고 싶은 애끓는 열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는 그의 작전은 사랑하는 동생을 합법적으로 곁에 두려는 치밀한 계략이었습니다. 과거 형들이 라헬의 첫째 아들인 자신을 버렸듯 이번에도 라헬의 둘째 아들인 베냐민을 쉽게 포기할 것인가? 요셉의 열정은 오랜 상처와 그리움이 빚어낸 날카롭고도 슬픈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형들의 마음을 저울질함과 동시에 자신의 가장 깊은 소망을 이루려 했습니다. 2. 옷에 묻은 피에서 심장에 묻은 피로 이 극적인 상황에 유다가 나섭니다. 과거 동생을 은 이십에 팔아넘기자고 제안하고 동생의 옷에 염소 피를 묻혀 아버지를 속였던 바로 그 유다입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과거의 그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절박한 호소는 오랬동안 쌓아온 후회의 크기와 깊이를 드러냅니다. 그는 아버지와 베냐민의 특별한 관계를 더는 시기와 질투로 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그 관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던집니다. 과거 동생의 옷에 피를 묻혀 책임을 전가했던 그는 이제 "저 아이 대신에 소인을 종으로 삼아달라"고 외치며 자신의 심장에 피를 묻히는 선택을 합니다. 유다는 베냐민의 옷이 아니라 자신의 심장에 피를 묻히는 선택을 한 겁니다....

벼랑 끝의 기도, 은혜의 서막 : 창세기 43장

벼랑 끝의 기도, 은혜의 서막 창세기 43장 묵상 "내가 그의 안전을 담보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의 일을 나에게 책임지우십시오.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로 다시 데리고 와서 아버지 앞에 세우지 못하면, 그 죄를 내가 평생 달게 받겠습니다." (창 43:9, 새번역) "너희들이 그 사람 앞에 설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사람을 감동시키셔서,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게 해주시기를 빌 뿐이다. 그가 거기에 남아 있는 아이와 베냐민도 너희와 함께 돌려보내 주시면 좋으련만! 자식들을 잃게 되면 잃는 것이지!" (창 43:14, 새번역) 1. 아버지의 침묵, 벼랑 끝에서 열리다 기근의 고통이 뼈를 깎는 듯이 심해졌지만, 야곱은 베냐민을 내어주지 못한 채 침묵합니다. 그의 침묵은 단호한 믿음이 아니라, 마지막 남은 아들만은 잃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통제의 몸부림이었습니다. 베냐민은 그에게 죽은 아내 라헬을 기억하게 하는 마지막 보루이자, 요셉을 잃은 트라우마가 빚어낸 집착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야곱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식량이 바닥나고 모든 가족이 죽음의 문턱에 이르자, 그의 완고한 침묵은 마침내 깨어집니다. 그의 결단은 위대한 신앙의 도약보다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벼랑 끝에서 내몰린 인간의 처절한 항복이었습니다. 2. 유다, 보증으로 서다 과거 요셉을 노예로 팔자고 제안했던 유다가 이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섭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베냐민을 지키겠다고 맹세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과거의 죄를 온몸으로 책임지려는 회개의 열매라 할 것입니다. 형제를 돈과 맞바꾸었던 그가 이제 형제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보증인이 되었습니다. 공동체의 위기 앞에서 한 사람의 진정한 변화가 어떻게 닫힌 문을 여는 열쇠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유다의 이 변화는 하나님의 구원 드라마의 위대한 복선이 됩니다. 3. "잃으면 잃으리이다": 주권에의 순복 야곱의 기...

마음, 안개 속에서 마주치다: 창세기 42장 묵상

마음, 안개 속에서 마주치다 창세기 42장 묵상 "당신들이 정직한 사람이면, 당신들 형제 가운데서 한 사람만 여기에 갇혀 있고, 나머지는 나가서, 곡식을 가지고 돌아가서, 집안 식구들이 허기를 면하도록 하시오." (창 42:19, 새번역) 그들이 서로 말하였다. "그렇다! 아우의 일로 벌을 받는 것이 분명하다! 아우가 우리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할 때에, 그가 그렇게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가 아우의 애원을 들어 주지 않은 것 때문에, 우리가 이제 이런 괴로움을 당하는구나." (창 42:21, 새번역) 1. 꿈의 성취, 그러나 텅 빈 마음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요셉의 꿈은 마침내 현실이 되었습니다. 형들이 그의 앞에 엎드려 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통쾌한 승리의 순간이 아닙니다. 성경은 요셉이 "그들을 알아보고" "그들에게 한 꿈을 생각했다"고 기록합니다. 그의 마음은 20년 묵은 아픔과 그리움, 그리고 복잡한 상념으로 요동쳤을 것입니다. 꿈이 이루어졌지만 그의 영혼에 텅 빈 공허함이 함께 찾아왔습니다. 관계가 깨어진 채 이루어진 꿈은 결코 완전한 기쁨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부터 요셉의 모든 행동은 단순히 꿈의 성취를 확인하기보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려는 고통스러운 몸부림이 됩니다. 2. 시험 속에 감추어진 자비 요셉은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아붙이며 가혹한 시험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의 첫 계획, 즉 한 사람만 돌려보내고 아홉을 가두려던 계획은 곧 수정됩니다. 그는 한 사람만 남기고 아홉을 돌려보냅니다. 이 작은 변화 속에 그의 '세심한 마음씨'가 빛을 발합니다. 굶주리고 있을 아버지와 조카들, 가나안에 있는 대가족(70여 명)을 그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그 많은 식구들을 먹일 곡식을 운반할 수 있겠는가?" 요셉은 가족의 생존을 염려하는 사랑으로 감싸여 있었습니다. 그는 ...

하나님의 때, 제국의 꿈을 깨우다: 창세기 41장 묵상

하나님의 때, 제국의 꿈을 깨우다 창세기 41장 묵상 바로가 요셉에게 말하였다. "내가 꿈 하나를 꾸었는데, 그것을 해몽할 사람이 없다. 나는 네가 꿈 이야기를 들으면 잘 푼다고 들었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그것은 저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임금님께 평안을 주시는 응답을 하실 것입니다." (창 41:15-16, 새번역) 둘째는 "내가 고생하던 이 땅에서, 하나님이 자손을 번성하게 해주셨다" 하면서, 그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지었다. (창 41:52, 새번역) 1. 하나님의 주권, 역사의 무대에 서다 만 2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잊혀진 시간, 침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잊은 것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셨습니다. 40장의 꿈이 감옥이라는 개인적 공간을 배경으로 했다면, 41장의 꿈은 이집트 제국이라는 역사의 무대 한가운데서 펼쳐집니다. 이 꿈의 무게를 강조하기 위해 성경은 파라오의 꿈, 그의 설명, 요셉의 해몽을 통해 세 번이나 내용을 반복합니다. 이는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계획임을 선포하는 문학적 장치입니다. 이방의 왕,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던 파라오조차도 하나님의 손안에서 꿈을 꾸고 불안에 떱니다. 이로써 창세기는 분명히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이스라엘의 울타리를 넘어 온 열방의 역사와 운명까지도 다스리십니다. 2. 예언자의 자세, 통로인가 근원인가 파라오 앞에 선 요셉의 모습은 40장보다 한층 더 깊어진 성숙을 보여줍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지혜자들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 앞에서 "그것은 저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라고 선을 긋습니다. 그는 지혜의 '근원(source)'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흘러가는 '통로(channel)'임을 분명히 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여 권력을 얻으려는 세상의 방식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길입니다. 오랜 고난은 그에게서 자아를 드러내려는 모든 욕망을 깎아내고...

잊혀진 시간 속에서 꾸는 하나님의 꿈 : 창세기 40장 묵상

잊혀진 시간 속에서 꾸는 하나님의 꿈 창세기 40장 묵상 감옥에 갇힌 두 사람 곧 이집트 왕에게 술잔을 올리는 시종장과 빵을 구워 올리는 시종장이, 같은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꿈의 내용이 저마다 달랐다. (창 40:5, 새번역)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우리가 꿈을 꾸었는데, 해몽할 사람이 없어서 그러네."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해몽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나에게 말씀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창 40:8, 새번역) 1. 하나님의 언어, 꿈 요셉 이야기의 동력은 '꿈'입니다. 자신의 꿈으로 인해 구덩이에 던져졌던 소년은, 이제 타인의 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풀어내는 사람이 됩니다. 꿈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인지 구조에 당신의 뜻을 새겨 넣으시는 신비한 계시의 통로입니다. 요셉은 이 사실을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의 고백인 "해몽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라는 말 속에는 과거 자신의 꿈을 자랑하던 미성숙함이 아닌 모든 지혜의 근원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깊은 겸손이 담겨 있습니다. 감옥이라는 절망의 공간도 하나님과 요셉 사이의 내밀한 소통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2. 진실을 감당하는 무게 요셉은 두 시종장의 꿈을 해몽하며 한 사람에게는 생명을, 다른 한 사람에게는 죽음을 선포합니다. 특히 빵 굽는 시종장에게 사형을 예고하는 그의 모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어 차갑게까지 느껴집니다. 이는 인간미의 상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랜 고난을 통해 빚어진 '하나님과의 단단하고 질긴 관계'의 증거입니다. 그는 이제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말을 하는 대신 생명이든 죽음이든 하나님으로부터 온 진실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려는 예언자적 성숙에 이른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게 두지 않으려는 이 영적 책임감이야말로 그가 얼마나 하나님과 깊은 신뢰 관계 속에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3. 잊혀진 2년, 침묵의 ...

가장 깊은 절망, 가장 가까운 동행 : 창세기 39장 묵상

가장 깊은 절망, 가장 가까운 동행 창세기 39장 묵상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안 일과 그 모든 재산을 맡겨서 관리하게 한 그 때부터, 주님께서 요셉을 보시고, 그 이집트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리시는 복이, 주인의 집 안에 있는 것이든지, 밭에 있는 것이든지, 그 주인이 가진 모든 것에 미쳤다. (창 39:5, 새번역) 요셉의 주인은 요셉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었다. 그 곳은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곳이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혔으나,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면서 돌보아 주시고, 그를 한결같이 사랑하셔서, 간수장의 눈에 들게 하셨다. (창 39:20-21, 새번역) 1. '함께하심'의 역설 요셉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의 유일한 뒷배는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39장은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므로(The LORD was with Joseph)"라는 구절을 반복하며 이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힙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고난으로부터의 면제(exemption)를 의미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통렬한 현실입니다. '함께하심'은 모든 것이 형통하고 복된 상태가 아니라, 가장 깊은 절망의 한복판을 통과할 때도 우리를 떠나지 않는 '동행(presence)'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의 삶이라 하여 모든 순간이 은혜와 축복일 수는 없습니다. 현실은 널 뛰듯 고점과 저점을 오갑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온몸으로 살아내야 할 신앙의 역설입니다. 2. 하나님의 '테두리', 성긴 듯 촘촘한 그물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한계일까? 추락하는 그 순간을 막아주지 못하는 무능함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 즉 그분의 '테두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로 인한...

창세기 38장 묵상 : 가장 부끄러운 족보, 가장 위대한 구원

가장 부끄러운 족보, 가장 위대한 구원 창세기 38장 묵상 그 무렵에 유다는 형제들에게서 떨어져 나가, 히라라고 하는 아둘람 사람이 사는 곳으로 가서, 그와 함께 살았다. 유다는 거기에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고 하는 사람의 딸을 만나서 결혼하고, 아내와 동침하였다. (창 38:1-2, 새번역)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서 말하였다. "그 여인이 나보다 더 옳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기로 하고서,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 38:26, 새번역) 1. 언약의 땅에서 벌어진 탈선 창세기 38장은 요셉 이야기의 흐름을 끊는 갑작스러운 막간극처럼 보입니다. 애굽으로 팔려 가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신실함을 지켜나갈 요셉과 달리, 유다는 형제들을 떠나 약속의 땅 언저리에서 탈선합니다. 그는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고, 아들들을 잃고, 며느리와의 약속마저 저버립니다. 요셉이 이방 땅에서 거룩함을 지킬 때, 언약의 장자권을 가진 유다는 약속의 땅에서 세속과 타협하며 언약의 대를 끊어버릴 위기를 자초합니다. 이 극명한 대조는 인간의 실패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이 실패를 뚫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드러내는 창세기 편집자의 신학적 장치입니다. 2. 하나님의 '스크래치', 성육신의 신비 유다의 가나안 여인과의 결혼, 그리고 이어지는 부끄러운 사건들은 훗날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질 왕의 족보에 지울 수 없는 '스크래치'를 남깁니다. 편집자는 역사적 예수를 몰랐을지라도, 다윗 왕조의 기원이 이처럼 부끄러운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흠결 때문에 예수의 품은 더 넓어집니다. 그의 피에 섞인 이방인의 흔적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허물고 열방을 품는 구원의 서막이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성육신이 이미 하나님으로서는 감당하신 가장 큰 '스크래치' 아니던가?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창세기 13장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

13장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 6   그러나 그 땅은 그들이 함께 머물기에는 좁았다. 그들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그 땅에서 함께 머물 수가 없었다. 7   아브람의 집짐승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집짐승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곤 하였다. 그 때에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도 살고 있었다. 16   내가 너의 자손을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누구든지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너의 자손을 셀 수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아브람 - 아직 이름 바뀌기 전이다)과 롯이 이집트로 갔다가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간다. 이집트에서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셨는데 특히 그들의 재산이 늘었다. 베델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으나 함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불어난 재산은 그들을 함께 살 수 없게 만들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분리 제안을 하며 그에게 먼저 땅을 선택하라고 했다. 롯은 제 눈에 좋아 보이는 땅을 선택해서 떠났다. 조카에게 삼촌의 여유로운 마음 씀씀이를 보였던 아브라함의 입이 씁쓸해졌다. 그렇다, 사랑은 내리 사랑이다.  세상사의 짜고 쓴 맛에 식욕 부진이 온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다시 찾아왔다. 하나님은 그를 처음 불렀을 때의 약속을 상기시켰다. “누구든지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너의 자손을 셀 수 있을 것이다.” 이 얼마나 입맛 살아나게 하는 말씀이며 촌철살인의 말씀인가. 하나님은 땅 때문에 섭섭한 아브라함을 어찌 이리 정확히 아시고 하늘의 별이나 바다의 모래 대신 땅의 먼지를 언급하셨단 말인가.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 쉴 때는 하늘의 별들을, 바다를 쳐다볼 땐 바닷가 모래를, 땅의 흩날리는 먼지를 보며 가슴이 휑하니 뚫리는 지금엔 땅의 먼지를 언급하며 ‘괜찮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내 말은 빈 말이 아님’을 확인해주신다. 사람의 넉넉...

창세기 11장 : 인간사를 뒤덮는 하나님의 품어주심

11장 인간사를 뒤덮는 하나님의 품어주심 1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9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세상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한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 10   셈의 족보는 이러하다. … 온 땅에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던 시절(1절), 인간은 한데 뭉쳐 하늘에 닿으려 했다.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신 하나님은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6절)라고 생각한다. 이 모습은 선악과를 범한 후 '눈이 밝아진' 아담과 하와를 향한 하나님의 반응(창 3:22)과 맥을 같이 한다. 하나님께서는 정녕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자율성이 당신께 위협이 되어 그것을 제지하려 하신 것인가? 어찌하여 에덴에서 그들을 내보내시고, 바벨에서 또다시 그 후예들을 의사소통을 단절시켜 흩으시는가? 창세기 편집자가 바벨탑 이야기 직후 셈의 족보(10절 이하)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시선을 옮기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의 흩으심 뒤에 이어지는 아브라함의 부르심(창 12:1)은, 마치 에덴에서의 추방 이후 다시 부르시어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소망의 서곡과 같다. 창세기 11장에서 시공을 초월하는 '구원 경륜의 중첩'을 본다. 바벨에서의 흩으심과 아브라함의 부르심, 이는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의 첫 번째 레이어이다. 분열과 혼돈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향한 구원의 실마리를 놓지 않는다. 에덴동산에서의 추방과 화염검, 그리고 인간의 죄로 인해 닫혔던 생명의 길(창 3:24)이, 언젠가는 그 화염검이 거두어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문이 활짝 열릴 것이라는 희망이 두 번째 레이어이다. 흙(아담)으로 지음 받은 인간 본질의 고통과 허무,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

창세기 10장 노아의 족보에서 확인하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

창세기 10장 노아의 족보에서 확인하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 아담에게 베풀어진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과 계명은 대홍수 이후 세상의 질서를 새롭게 시작한 노아에게도 동일하게 이어졌다. 노아의 후손들 가운데 특별히 주목할 이름은 가나안이다. 우리에게 부정적으로 익숙한 그 이름이 노아의 족보에 있다. 사실 태초에는 '이방인'이라는 구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인류는 노아의 자손이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아담으로부터 비롯된 하나의 가족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축복과 지침이 노아 시대까지 그 본질을 유지했다면,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이방인이라 불리는 이들 역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바뀌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모든 인류는 동일한 근원에서 비롯되었으며 같은 사랑을 받는 존재인 것이다. 하나님 이외의 것을 신이라 명명하며 숭배하지만 않으면 된다. 이방 신은 있어도 이방인은 없다.

창세기 9 : 물방울 표면에 새겨진 고통의 흔적들에 햇살이 비취면 무지개가 생성된다.

9장 물방울 표면에 새겨진 고통의 흔적들에 햇살이 비취면 무지개가 생성된다. 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울 것이니,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들을 없애는 일이 없을 것이다.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대홍수 때 노아와 방주의 동물, 그리고 물을 견딘 식물만 살아 남았다. 창세기 편집자는 희망한다. 다시는 심판이 없음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쓸어버린 물이 만든 방울의 표면에 사람들의 비명, 방주를 타지 못한 동물들의 절규, 물을 견디지 못한 식물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흔적으로 새겨져 있다. 거기를 태양이 비추니까 무지개가 생겨났다. 고통과 죽음, 회한과 탄식, 절규가 무지개로 말미암아 희망으로 영롱하게 빛난다.  창세기 편집자는 나라를 쑥대밭은 고사하고 화마가 태워버린 잿더미 위에서 새싹 한 줄기를 고대하며 옛 기억을 더듬는다: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모든 육체는 땅이지 않은가. 하나님은 땅 자체인 아담에게 동식물을 맡겼던 것처럼 땅을 유전한 노아에게도 맡겼다. 편집자는 허무하고 비극의 땅에서 무지개를 생성하고, 새싹을 피워내는 하나님의 뜻에 공감각한다.

창세기 8장: 그리스도교 신앙의 섬세함

8장 그리스도교 신앙의 섬세함 15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16   "너는 아내와 아들들과 며느리들을 데리고 방주에서 나가거라. 17   네가 데리고 있는, 살과 피를 지닌 모든 생물들, 곧 새와 집짐승과 땅 위에서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데리고 나가거라. 그래서 그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게 하여라." 18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을 데리고 나왔다. 19   모든 짐승, 모든 길짐승, 모든 새,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것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바깥으로 나왔다. 8장에서 두 가지가 두드러져 보인다. 하나, 17절은 창조 때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을 주신 것과 상응한다. 이것은 새로운 복주심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원래 뜻(복)이 지속된다는 의미이다. 22절의 말씀처럼 땅이 있는 한, 다시 말해서 피조물이 존재하는 한,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하더라도 복(생육과 번성)은 폐기되지 않는다. 창세기 편집자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서 그분의 신실함을 인간적으로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라는 후회로 표현했다. 방점은 하나님의 후회가 아닌 복(약속)의 지속성에 있다.  다른 하나, 노아의 신중함이다. 노아는 홍수가 끝이 나고 마침내 물이 빠졌음을 나름 상황 파악(까마귀와 비둘기를 통해)을 했다. 그럼에도 그는 방주의 문을 열지 못한다. 왜 그는 방주 문을 열지 못했을까? 하나님이 닫으셨기 때문이다(창 7:16). 노아의 훌륭한 인품은 인내다. 그는 방주를 지을 때도 그리고 방주에서 나올 때도 기다린다. 마침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너는 아내와 아들들과 며느리들을 데리고 방주에서 나가거라”(16절). 노아는 땅이 다 말라서 방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가라고 해서 방주 문을 열었다. 방주의 문이 열린 것은 같으나 그 이유는 다르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앙...

창세기 7장 :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절대 끊어질 수 없는 결속

7장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절대 끊어질 수 없는 결속 23절  이렇게 주님께서는 땅 위에 사는 모든 생물을 없애 버리셨다. 사람을 비롯하여 짐승까지, 길짐승과 공중의 새에 이르기까지, 땅 위에서 모두 없애 버리셨다. 다만 노아와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과 짐승들만이 살아 남았다.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거의 전체 피조물이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노아를 선택해 방주를 만들게 하여 피조물의 일부를 살린다. 이 이야기에서 창세기 편집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하나님은 창세기 편집자를 통해 무엇을 말씀하고 싶은가? 이 이야기도 윤리적 가르침에 멈추어야 하는가? 이 이야기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생활을 가리키는 예시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윤리적 교훈은 성서 아니어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성서가 궁극적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깊은 속을 어찌 알 수 있겠냐만, 그저 수박겉핥기식으로라도 생각하자면, 하나님의 구원 의지는 비록 사람으로부의 악이 성하다 하더라도 결코 단절되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 같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강한 결속력을 드러내고 싶은 것 같다. 로마서의 말씀처럼, 이 강한 결속을 사탄도, 천사도, 사람도,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해체할 수 없다. 창조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은 단순 행복 감정이 아니다. 당신의 결속 의지를 좋았다고 표명한 것이다. 노아 홍수 이야기는 사람이 하나님의 그 의지를 결코 무효화할 수 없음을 가리킨다. 몇 명이 구원을 받았고, 구원 받지 못한 피조물 가운데서 동물의 선악을 따지는 것, 노아의 자식들은 선했냐는 물음 등은 절대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결속력에 초점을 맞추지 못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와 노아와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과 짐승들만이 살아 남았는 구절은 예수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씀이다와 연결된다.

창세기 6장: 하나님의 한 줄기 빛의 점

6장 하나님의 한 줄기 빛의 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은 것이 하나님의 눈에는 좋지 않았다. 홍수 심판의 직접적 원인이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벌인 문제로 말미암아 사람뿐 아니라 피조물 전체가 죽어야 하는 심판을 당했다. 창세기 편집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창세기 저자는 어느 편의 잘잘못을 따지려고 했다기보다 사람의 위치를 정확히 하고 싶어 한다. 사람의 딸이 하나님의 아들과 결혼하고, 그래서 영웅과 전사를 낳는다는 이미지는 뱀이 에덴의 아담과 이브를 찾아와 선악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는 그림과 닮았다. 외형이 아니라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 본성이 두 장면을 연결한다. 하나님이 그런 세상을 심판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의 결정을 더했다. 노아를 찾아내기로 한 결정이다. 사람의 본성을 지닌 노아가 하나님의 눈에 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일부러 노아를 사람의 대표로 찾아냈다. 홍수에서 살아남을 사람의 대표로서 말이다. 나는 노아를 찾아내는 하나님의 시선에서 그분의 애정을 얼핏 본다. 나는 방주에 동물들도 태우라는 명령에서 하나님의 넓은 사랑의 시선을 엿본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 명령하시고,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만남이라는 억지스런 이미지에 창세기의 저자가 반짝이게 하는 한 줄기 빛의 점이다.

창세기 4-5장: 이산화탄소 발생 같은 사람의 낳고 낳음

4-5장 이산화탄소 발생 같은 사람의 낳고 낳음 동생을 죽인 가인은 하나님의 벌을 받고 방황하는 땅으로 쫓겨난다. 하나님과 가인을 연결하는 것은 그에게 새겨진 죽임을 당하지 않을 표식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애정의 표시이자 가느다란 소망의 표시이다. 창세기 4-5장은 하나님과 같이 되어보려 한 아담의 후예가, 동생을 죽인 가인의 자식들이 800년, 900년이라는 생을 살았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루하고 비루하고 무의미한 생의 기록들이다. 가인을 죽이는 자의 벌은 7배의 가중 처벌이라면, 그의 후손 라멕을 해치는 자가 받을 벌은 77배로 늘어난다. 죄와 벌이 그만큼 쌓여간 기록이다. 아벨의 피가 뿌려진 땅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의 증오와 보복의 퇴적층이다. 여기엔 숨 쉴 공간, 위로를 주고 받을 수 없다. 증오와 보복은 산소가 아니라 이산화탄소다. 아담의 자손 라멕이 증오와 보복이라는 저주를 안고 태어나는 아이의 탄생에서 위로를 갈망하는 모습은 그 퇴적층의 절망감을 보여준다. 나는 4-5장을 읽으며 답답해져서 눈을 감았다. 답답증은 그대로 이어졌다. 한참을 낳고 낳음의 기록에서 지루하다 못해 비루한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수백년을 산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요즘도 100세 인생이 결코 복인 것만은 아닌데, 평균 800년이라는 시간은 차라리 저주가 아닌가. 내가 겪은 허무의 시간을 자식이 그대로 이어받아야 하는 숙명에서 ‘위로’라는 한 송이 꽃을 기대한다 해서 그 꽃이 피어날리 없다. 블랙홀과 같은 시공간에서 탈출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한참 눈을 감고 한탄 중간쯤 기도를 헤매고 있는데, 불현듯 마태복음 1장의 낳고의 기록이 떠올랐다. 거기에도 노아에 거는 아버지 라멕의 부질 없는 기대와 같은 것이 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창세기 4-5장은 사람의 낳고 낳음의 시간이라면, 마태복음에는 그리고 누가복음의 그 기록에는 하나님이 허무의 시공간에 들어온다. 인간으로부터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의 행동이 시작된 거다. 마태와 누가가 보았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