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5장: 이산화탄소 발생 같은 사람의 낳고 낳음
4-5장 이산화탄소 발생 같은 사람의 낳고 낳음
동생을 죽인 가인은 하나님의 벌을 받고 방황하는 땅으로 쫓겨난다. 하나님과 가인을 연결하는 것은 그에게 새겨진 죽임을 당하지 않을 표식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애정의 표시이자 가느다란 소망의 표시이다. 창세기 4-5장은 하나님과 같이 되어보려 한 아담의 후예가, 동생을 죽인 가인의 자식들이 800년, 900년이라는 생을 살았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루하고 비루하고 무의미한 생의 기록들이다. 가인을 죽이는 자의 벌은 7배의 가중 처벌이라면, 그의 후손 라멕을 해치는 자가 받을 벌은 77배로 늘어난다. 죄와 벌이 그만큼 쌓여간 기록이다. 아벨의 피가 뿌려진 땅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의 증오와 보복의 퇴적층이다. 여기엔 숨 쉴 공간, 위로를 주고 받을 수 없다. 증오와 보복은 산소가 아니라 이산화탄소다. 아담의 자손 라멕이 증오와 보복이라는 저주를 안고 태어나는 아이의 탄생에서 위로를 갈망하는 모습은 그 퇴적층의 절망감을 보여준다.
나는 4-5장을 읽으며 답답해져서 눈을 감았다. 답답증은 그대로 이어졌다. 한참을 낳고 낳음의 기록에서 지루하다 못해 비루한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수백년을 산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요즘도 100세 인생이 결코 복인 것만은 아닌데, 평균 800년이라는 시간은 차라리 저주가 아닌가. 내가 겪은 허무의 시간을 자식이 그대로 이어받아야 하는 숙명에서 ‘위로’라는 한 송이 꽃을 기대한다 해서 그 꽃이 피어날리 없다. 블랙홀과 같은 시공간에서 탈출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한참 눈을 감고 한탄 중간쯤 기도를 헤매고 있는데, 불현듯 마태복음 1장의 낳고의 기록이 떠올랐다. 거기에도 노아에 거는 아버지 라멕의 부질 없는 기대와 같은 것이 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창세기 4-5장은 사람의 낳고 낳음의 시간이라면, 마태복음에는 그리고 누가복음의 그 기록에는 하나님이 허무의 시공간에 들어온다. 인간으로부터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의 행동이 시작된 거다. 마태와 누가가 보았던 것을 어렴풋이 나도 느꼈구나 싶으니 답답한 마음이 조금 가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