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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 속에 임하는 하느님의 나라 (눅 10:1-11, 16-20)

오늘 설교자는 누가복음 10:1-11, 16-20을 "하느님 나라, 우리 곁에 가까이"라는 제목을 설교했다. 설교자는 본문으로부터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정의를 들어보자고 하며, 70(72)명이라는 당시로서는 대규모 제자 파송(35-36고을 파송)에 빗대어  하느님 나라의 넓은 범위를 그렸다. 하느님의 나라는 저 구석 동네에도, 존재감 없는 "그 사람"에게도 임한다.  광범위하게 파송 받은 제자들의 선포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하느님 나라의 가까움이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 예수의 선포 일성과 같은 맥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환대에서 가까울 수 있음을 강조한다. 하느님 나라의 가까움은 시간적으로는 곧, 임박이고, 내용적으로는 종말론적이며, 그 형태는 환대 속에 실존한다. 여기서 환대는 나그네 제자들을 반가이 맞이하는 면도, 하느님 편에서는 나그네들을 조건 없는(비유하자면, 전대도, 신발도, 지팡이도, 인사할 여유도 없는 인생을 무조건 반가이 맞이하는) 수용이다. 인간 편에서의 환대는 하느님 편에서의 환대의 모상이다. 설교자는 역사적 예수의 육성이라고 여겨지는 본문 10절,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볼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를 소개하며 환대에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최후 승리를 주목하자고 권면했다. 최일도 목사가 밥퍼 사역을 시작하게 된 사건을 소개하며 설교자는 라면 한 그릇을 사면 환대 상황이 조성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환대는 하느님 나라의 작동 스위치이다. 

고통 해소 전략 (시 102:21-28)

오늘 설교자는 시편 102:21-28을 "괴로운 날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설교자는 공감이 주는 위로의 내용의 예화로 시작했다.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는 치유의 단골 메뉴다. 설교자는 시편 저자의 극한 고립감, 좌절, 고통으로부터 절규를 소개만 하지 않고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갈 것을 촉구했다. 여전한 외적 고난 상황이지만 내적 희망 속으로 한 발자국 내딛는 것, 그것은 하나님 신뢰 속으로 자신을 던지는 결단이다.  그런데, 과연 설교는 정답을 주어야만 하는가? 그런 강박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가? 시편 본문의 주인공이 고난 속에서 개인 집착에서 벗어나 보다 큰 이상(혹은 공동체)으로 승화시키는 대상이 하나님이라면 더는 딴지를 걸 수 없다. 비록 답이 없어 보여도, 설교는 천편일률의 공식,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돼야 하지 않을까. 

예수의 치유 능력이 사람의 본성도 치료해주시길 (눅 8:26-39)

오늘 설교자는 누가복음 8:26-39을 "치유, 그 너머의 이야기-고립을 넘어 공동체로" 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설교자는 본문에서 저자 누가의 시선을 세 가지로 나누어 해석했다. 첫째는 치유 받은 사람의 이후의 삶이다. 누가는 무덤가에서 옷 벗고 살던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예수의 말씀에서 회복을 보았다. 둘째는 기적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그것은 작용과 반작용처럼 돼지떼의 몰살을 초래했다. 신앙은 꽃내음만이 아니라 두려움도 가져올 수 있다. 이 사실을 누가는 어떻게든 자신의 기록에 녹여 냈다. 셋째는 귀신의 이름을 레기온(legion)이라고 함으로써 귀신 들린 자를 로마로부터 압제당하는 이스라엘을 대리하는 자로 만들었다. 귀신 들린 사람은 더는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한다. 누가의 시선이 그만큼 넓어졌다. 설교자는 그렇다고 개인의 치유와 해방을 가벼이 여기지는 말자고 당부했다.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 정신을 찾아 공동체로 돌아가는 상징을 놓치지 말자고 했다. 마지막으로 설교자는 우리 시대의 귀신은 누굴까?를 물었다. 사람이 귀신 아닐까, 사람은 자기 죄도 사탄에게 뒤집어 씌우려든다. 사람이 사탄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사람은 사탄을 객관화 하여 실체로 만들며 요나처럼 다시스로 도피하려고 배를 탔다. 그 배가 사람의 바람대로 다시스로 갔을까? 사람의 모든 생각은 삼키워져야 한다. 적어도 삼일 밤낮을. 그만큼 사람의 고질병은 치유받기도 하기도 어렵다. 

삼위일체 바이브 (요 16:12-15)

오늘 설교자는 요한복음 16:12-15을 "하느님을 알아가는 여정, 삼위일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설교자는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전제했다. 하나님을 손에 잡으려고 하는 것이 구도라면, 그 구도의 과정이 중요하지 끝은 장담할 수 없다. 하나님을 손에 잡으려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우리 손에 잡혀주셔야 한다. 삼위일체가 가리키는 모습, 뉘앙스를 느끼며 살자고 했다. 삼위일체가 주는 효과를 누리며 살자는 거다.  나는 삼위일체를 주장해야 했던, 정리해야 했던 시대적 상황이 궁금하다. 예수가 하나님이어야만 했던 상황이 있었는지, 예수와 하나님 사이에 성령이 어떻게 들어왔는지, 이것을 어떻게 하나로 고백하게 되었는가가 궁금하다.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에도 하나님의 섭리로서 마치 인간 원리(anthropic principle)가 내재해 있는가?

성령의 참 능력 (요 14:8-14)

오늘 설교자는 요한복음 14:8-14을 "흔들리는 질문, 견고한 대답"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빌립이 예수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청한다. 그렇다, 빌립이 예수와 3년간 동고동락했으나 그는 여전히 흔들리는 질문을 했다. 설교자는 빌립에게 공감각하는 나를 드러냈다. 빌립의 질문에 예수는 아버지를 나에게서 찾으라고 말씀한다. 그렇다, 신앙과 신학은 그리스도론적이어야 한다. 실제로 예수의 그리스도론적 말씀이 빌립에게 힘이 됐을까? 설교자는 그것보다 예수의 그다음 말씀에서 빌립의 마음이 편안해졌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성령의 강림이다. 보혜사 성령의 오심은 그야말로 성령의 케노시스(kenosis)인데, 그것은 성육신(incarnation)처럼 우리의 준비, 기다림, 신앙, 상황, 존재론적 가치를 따지지 않는다. 빌립의 혼란 속의 질문은 예수의 파라클레토스의 오심에서 해소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14절)는 말씀은 예레미야 31:33의 다른 표현이라 하겠다. 율법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주시는 것과 혼란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성령의 케노시스를 통해 시원한 의사소통의 결과로서 평화(평안)은 동의어다. 이것이 성령의 진짜 능력이라 하겠다. 

예수는 왜 하나됨을 기도했을까? (요 17:20-26)

오늘 설교자는 요한복음 17:20-26을 "따로 또 같이, 진정한 하나됨"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설교자는 본문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사회학의 용어 두 가지를 소개했다: 재어휘화(relexicalization)와 과어휘화(overlexicalization). 재어휘화는 주류에서 쫓겨나거나 마이너하게 된 공동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강화하려고 기존 어휘를 의미 변형을 하여 자기들의 의사소통 코드로 만드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영광, 보냄을 받음, 하나됨 같은 단어가 재어휘화의 예이다. 과어휘화는 하나의 목적 혹은 대상을 다양한 어휘를 동원해 표현하는 것이다. 본문이 속한 요한복음 17장의 전체 주제는 "(하나님과 예수의 서클에) 하나됨"인데, 예수의 기도 속에 다양하게 표현된다.  본문의 주제인 "하나됨"이 재어휘화와 과어휘화를 해야만 유지되는 요한 공동체뿐만 아니라 사실상 상식인데, 현실은 어떤가? 본문의 구절들은 보편 교회를 옹호하는 구절, 그러니까 주류 공동체를 떠받치는 데 이용되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됨의 이유는 획일화를 반대한다. 왜 예수는 하나됨을 기도해야만 했는가? 

포스트 부활의 생활(요 21:1-19)

오늘 설교자는 요한복음 21:1-19을 "다시 시작하는 삶의 항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설교자는 요한복음 21장이 1세기에 유행하던 문학 장치를 닮았다고 했다. 그것은 에필로그 형식이다. 하나의 큰 이야기가 끝나고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한 번 더 속내를 드러내거나 새로운 상황으로 독자들을 환기시킨다. 설교자는 본문에서 크게 네 가지 장면을 포착해 소개했다. 1. 일상으로 돌아간 제자들이 체념하는 모습도 있었지만 3년간 체험한 대로 공동체적 모습, 함께 사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2. 배 밖에 계셔도 여전히 제자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이다. 다른 장면에서는 예수님이 배 안에서 주무시며 제자들과 함께 계셨고, 본문에서 예수님은 배 밖에 계시나 그래도 제자들과 함께 한다. 예수님의 함께 하심은 배 안이든 배 밖이든 변함이 없다. 3.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본 때는 공동식사, 친교의 자리이다. 친교의 자리는 본문의 전체 배경이 되는 포스트-부활(post-resurrection) 생활의 핵심이다. 4. 예수는 베드로를 회복시키려고 디베랴 호숫가에 오셨다.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예수는 세 번 질문을 한다. 예수는 아가페로 두 번 질문했고, 베드로는 필레오로 답했다. 세 번째로 예수는 아가페 대신 필레오 하냐고 물었다. 질문과 대답은 아가페와 필레오지만, 변함 없는 사실은 "내 양을 돌보라"이다. 예수에게는 아가페도 필레오도 상관 없다. 요한복음 17장에서 하나님과 당신의 써클로 사람들을 끌어들이셨는데, 이제와서 아가페나 필레오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요한복음의 에필로그 21장은 희망으로 가득하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다시 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한가득 담고 있다. 디베랴 호숫가는 체념의 물로 채워질 수 없고, 고기도 많이 잡히는 생명의 물이 가득해야 한다. 거기 호숫가에 예수님이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책임의 원칙 (요 20:19-31)

오늘 설교자는 요한복음 20:19-31을 "신앙에 이르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도마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믿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났을 때, 단번에 믿음에 이르게 되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람들 모두가 도마와 같지는 않았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는 단번에 예수의 부활을 믿었고, 어떤 이들은 점차 믿었다.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가 그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이다.  설교자는 여기서 레비나스의 사유를 가져와 예수 그리고 그분을 만난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거기서 발생한 책임을 설명했다. 예수가 제자를 부를 때, 만날 때, 예수에게는 책임이 발생한다. 예수의 부르심과 나타남은 책임 발생 사건이다. 대상자에 대한 예수의 책임이 발생할 때, 둘의 관계는 무의미에서 유의미로 바뀐다. 본문에 따르면, 예수의 책임은 그가 만나신 이들에게 평화를 선물하는 것이다. 당신 혼자 안 되면 성령을 동원해서라도 예수는 당신이 만난 사람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기를 바란다. '아버지가 나(예수)를 보냈듯이 나도 너희(제자)를 보낸다'는 예수의 말씀은 '아버지가 나를 책임지셨듯이 나도 너희를 책임지겠다'는 의미이다. 이 말씀은 제자의 사명이라는 겉껍질에 더는 갇혀 있을 수 없다. 예수가 유언으로 남기신 기도의 내용에 부응해야 한다. 

새로운 관계 속으로 부르심 (요 20:11-18)

오늘 설교자는 요한복음 20:11-18을 "나를 붙잡지 말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부활절을 맞아 설교자는 예수를 올바르게 붙잡고 새로운 삶, 곧 새 생명 얻은 삶을 살자고 강조한다. 설교자는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를 드디어 알아보고 손을 대려했을 때, 예수가 "내게 손대지 말라, 나를 붙잡지 말라"고 막아선 장면을 파고 들었다. 그랬던 예수님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도마에게는 나를 만지라, 옆구리에 손 넣으라고 하신 것은 막달라 마리아의 장면과 서로 상치되는 것 아니냐는 거다. 예수님이 한 입으로 두 말 할 이유는 없을 텐데 왜 그렇게 상반되는 말씀을 하셨을까?  설교자는 우리가 무엇을 익숙하게 붙잡고 있는가를 성찰하자고 했다. 설교자는 해당 장면에 대한 로완 윌리엄스의 해석을 소개했다. 나를 만지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은 나를 이용하지 말라는 뜻이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리고 도마에게 건네신 예수님의 말씀은 겉으로는 상반된 모습이나 속 뜻은 하나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나를 이용하려던 붙잡음에서 나와 함께 새로운 관계와 삶, 곧 나의 아버지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이 곧 너희의 하나님이시라는 관계 속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이다(요 17장의 유언 기도 성취).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에 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부활절을 올바르게 지키는 것 아니겠는가. 

종려나무 가지를 밟고 가는 나귀 (마 21:5-10)

오늘 설교자는 마태복음 21:5-10을 "봐라, 이게 평화다"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설교자는 종려나무 가지의 역사를 BC 2세기부터 예수님 시대까지를 짧게 정리했다. 셀류쿠스가 유대를 침략했다. 자칭 에피파네스(신의 현현) 안티오쿠스 4세는 성전에 제우스 상을 세우고 돼지고기를 먹게 했다. 종교-문화적으로 유다이즘은 헬레니즘에 철저히 짓밟혔다. 그러나 BC 168년 7월초, 마카베오 형제는 예루살렘을 탈환했는데, 그들이 성으로 들어갈 때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바닥에 깔았다. 그러나, 그 영광은 오래 가지 못했다. BC 63년경에 유대는 로마 식민지가 되고 만다. 사람들은 마카베오 같은 이, 메시아가 나타나길 바랐다.  시간이 좀 더 흘러 나사렛 예수에 대한 소문은 마침내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챙겨서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 -그것도 유월 절기 때 - 옛날처럼 흔들고 깔았다. 호산나, 제발 구원해주세요(호시아 + 나: 구원하소서 + 제발) 라고 외치며. 어디로부터의 구출이고 구원인가? 로마로부터의 해방이다.  예수는 종려나무 가지에 담은 사람들의 기대를 만족시켰을까? 예수는 "나귀"를 타고 종려나무 가지 위를 밟았다. 설교자는 이쯤에서 김교신 선생의 나귀, 곧 자전거를 소개했다. 선생의 자전거는 밀고 당기고 숨을 가쁘게 만드는 힘 센 전차에 맞선다. 예수는 힘과 폭력과 경쟁과 억압으로부터 구출이라는 기대를 한껏 담은 종려나무 가지 위를 나귀를 타고 지나갔다.  그렇다, 예수는 칼과 병거와 군마를 십자가로 막았다. 예수가 제시한 나귀와 십자가로서의 평화는 우리를 고민하게 만들고 갈등하게 만들며 주저하도록 한다. 승산 없어 보이는 싸움에 목을 걸어야 하는데 고민과 갈등이 없을 수 있겠는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마리아의 현자의 촉 (요 12:1-8)

오늘 설교자는 요한복음 12:1-8을 "사랑의 예언자, 베다니 마리아"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설교자는 본문을 가룟 유다와 마리아를 대조하며 해석했는데, 그것은 편집자 요한의 시각이다. 본문의 장소는 아직 죽음의 냄새가 가시지 않은 나사로의 집이다. 거기에 최고의 향수 냄새가 퍼진다.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가룟 유다의 가난한 자를 위한 돈 사용에 맞서는 마리아의 애정의 과소비가 맞선다. 남성 가룟유다의 이중성(요한은 혹시라도 사람들이 오해할까봐 각주 대신 아예 본문에 박제했다, 6절)과 여성 마리아의 진정성 넘치는 감성이 맞선다.  마침내 예수가 이 둘의 대립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7-8절) 마리아는 정말 예수의 죽음을 알아챘을까?  설교자는 예수와 마리아 사이의 애정을 대답으로 던졌다. 마리아는 다가올 예수의 죽음을 직감/감성적으로 알아챘고, 예수는 마리아가 사랑의 촉으로 알아차린 통찰에 고마워 했다. 가룟 유다 닮은 이들은 마리아의 현자의 촉이 없다. 요한 편집자와 한참 시대가 흐른 뒤에 요한의 메시지를 해석하는 설교자는 마리아의 사랑의 눈에 공감각한다.

예수의 탄식에 함께 탄식하는 멋진 동맹 (눅 13:31-35)

오늘 설교자는 누가복음 13:31-35을 "뜻 밖의 협력자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본문은 누가복음 만의 특수 사료이다. 본문의 장면이 누가복음에만 나온다는 당연한 사실 너머에 있는 누가만의 특수한 시각이 무엇일까? 대개 바리새인은 예수와 적대적인 관계인데, 본문의 바리새인은 예수의 협력자로 등장한다. 헤롯의 살해 계략을 알려주며 어서 피하라고 예수를 돕는다. 누가복음 13:1에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의 피를 제물에 섞은 사건에 예수와 바리새인은 함께 화를 낸다. 바리새인이 예수의 동맹 그룹이 된 것은 누가 편집자의 특수 시각이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의 종교적-정치적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예수와 바리새인은 함께 탄식한다.  설교자는 현재 한국교회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열거했다. 얼토당토 않은 식민지 복음화론, 교주화, 성차별, 미신, 돈에 미친 현상 등, 이 모든 것은 한국 개신교 몰락의 현상이다. 서기 30년경의 예수의 탄식은 50년 정도 이후의 누가 편집자에게서도 그치지 못했고, 이후 2000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예수의 장탄식이다. 예수의 탄식에 동맹 그룹을 형성하자.

하나님의 아들의 아방가르드적 삶 (눅 4:1-13)

오늘 설교자는 누가복음 4:1-13을 "광야의 시험, 끝내 인간이었기에"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본문은 예수의 광야 시험 사건인데, 주요 등장인물은 시험 사건 직전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예수와 사탄이다. 설교자는 누가 편집자의 하나님 아들 개념을 누가복음 3장의 족보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 아담'으로 마무리되는 아래로부터의 관점(참고. 마태복음의 족보는 위로부터)을 통해 인간성을 포함한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숨결로 충만한 아담(창세기)처럼 그분의 숨결로 충만한 예수는 같은 선상에 있다.  사탄의 주특기는 시험이다. 누가가 정리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서 받는 사탄의 시험은 세 가지로서 빵, 권력, 그리고 사탄 경배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삶에서 빵이 중요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다른 무엇이 있다고 시험 답안을 적어냈다. 권력, 특히 하나님 아들의 증거가 되는 기적을 거부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성전 꼭대기에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을 신분, 곧 십자가를 피할 권세를 거부한다. 마지막으로 사탄의 최고 난이도의 시험은 경배이다. 이 시험은 떡과 권력을 아우르는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답안을 썼다.  누가 편집자의 시각의 특징인 인간성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여기에 아담도 예수도 그리고 나는 동일한 선 위에 선다. 마찬가지로 인간성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누가가 고민한 사탄의 세 가지 시험도 피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설교자는 인간성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본받아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의 아방가르드(전위대)로 살자고 촉구했다. 

산 밑으로 내려가는 것은 예수의 뜻이다 (눅 9:28-36)

오늘 설교자는 누가복음 9:28-36을 "산 밑으로 마을로 내려가자"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누가복음의 예수 변모 본문의 특징은 산상 대화의 내용이 나와 있는 점이다. 대화의 내용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의 떠나가심이다. 예수의 떠나감은 산 위에 머물자는 베드로의 요구를 거부한다.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떠나야 한다. 거기서 그는 십자가와 부활과 마침내 승천을 하여 떠나야 한다. 이것은 편집자 누가의 신앙 해석이다. 편집자 누가의 결정타는 이 구절이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35절) 사탄 들린 소리 하지 말라는 경고를 들은 베드로는 여전히 정신 못차리고 산 위에 머물자고 요청했다. 베드로가 하늘로부터 들려온 35절의 소리를 듣고 깨달음에 이르렀을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 (눅 6:27-38)

오늘 설교자는 누가복음 6:27-38을 "사랑과 저항, 비폭력"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한다. 원수란 말이 당시엔 지배 계층의 언어로서 민중의 언어가 아니었다. 정말 그럴까? 어쨌든 설교자는 원수 사랑을 비폭력과 같다고 했다. 나는 나를 해코지 하는 이를 무조건 품을 수 있는가? 사람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으니 비폭력에 리미트를 건다. 비폭력은 저항 자체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정의를 방치할 수는 없다. 부정의를 방치한다면 그것은 참 된 사랑이 아니다. 다만, 원수를 증오하진 말자. 비폭력과 원수 사랑의 한계와 덫을 경험한 지혜로운 선배들은 다음의 말로 정리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 그렇다. 원수를 무조건 사랑해서 발생할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독재자를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독재만은 멈춰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의 원수 사랑을 사람이 어찌 다 이해할 수 있으며 적용할 수 있으리오.  이 덫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쳐본다면, 비폭력 원수 사랑을 사람의 적용 차원이 아닌 예수의 자기 다짐으로 보는 건 어떤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적지 못할 내 죄를 용서받을 때는 그 경계가 없다가, 저 놈의 죄에 대하여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를 이상하게 적용해서 "죄도 사람도 다 미워하자"로 가버리는 나의 욕망은 구원받아야 한다. 

공감으로써 구조적 가난과 슬픔을 이겨내자 (눅 6:17-26)

오늘 설교자는 누가복음 6:17-26을 "빈곤과 돌봄"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본문과 마태복음 5-7장의 내용이 비슷한데 예수의 선포 위치가 다르다. 마태복음의 해당 본문은 산 위에서, 누가복음의 본문은 산 아래이다. 각 복음서의 편집자가 수신자/대상/독자에 따라 그렇게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설교자는 누가복음 본문의 특징을 역설, 계급, 그리고 차별로 보았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가난과 부함, 복과 저주를 대비하여 드러내는 차별적 관점이다. 어디에서 차별이 두드러지는가? 본문은 가난을 주목한다. 본문의 가난은 상대적이지 않고 구조적이며 절대적 가난이다. 거기서 필연적으로 파생하는 슬픔은 구조적일 수밖에 없고 한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교회는 구조적 가난과 거기서 파생하는 한을 무엇으로써 극복해야 하는가? 설교자는 교회의 특징을 교회 출생의 근거로부터 찾았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태동되었다. 성령의 애칭이 파라클레토스/변호자/돌봄이 아니던가. 교회는 돌봄으로써 구조적 가난을 부숴야 한다. 교회는 돌봄의 네트워크를 구현함으로써 교회의 목표인 "안식"에 이르러야 한다. 여기서 끝내지 않고 설교자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까지 제시했다. 공감이다. 

예수의 부름을 받은 자는 각양각색으로 예수를 따른다 (눅 5:1-11)

오늘 설교자는 누가복음 5:1-11을 "모든 것을 버려두고"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설교자는 오늘날 한국 교회가 예언자적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가를 성찰하자고 했다. 설교자는 본문을 짧지만 시몬 베드로를 통해 미래의 예수 운동 지도자를 부르는 상황으로 해석했다. 예수의 제자 부름의 특징은 대체로 제자의 실패 경험, 현재의 약점과 무엇보다 죄의식, 그리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이다. 제자는 예수의 비전, 곧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는 희망을 붙잡으면 된다.  예수의 부름을 받은 시몬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다. 설교자는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말자고 하면서, 예수 이후 200년 동안의 다양한 초기 교회의 모습을 소개하며, 로마 제국 환경에서 다양한 신앙고백과 생존을 기억하자고 했다. 예수의 부름을 받은 제자가 100명이라면 100가지의 형태로 사명을 감당한다. 

내 삶의 괴리를 치유하는 예수 (눅 4: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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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자는 누가복음 4:22-30을 “화난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본문은 예수가 고향에 갔다가 반갑게 맞아주기는 커녕 살인 위협을 받고 내쫓긴 사건이다. 설교를 시작하며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를 두 번 들었다. 옛날 내 싸이월드 대문에서 듣던 익숙한 멜로디다. 샌프란시스코는 돌아온 고향 사람을 가슴을 활짝 열고 안아주는데, 예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에게 화를 내며 꺼지라고 했다.  설교자는 예수와 고향 사람들의 대화에서 예수의 예언자적 자의식과 이방인에 대한 관심(구원)에 예수의 고향 사람들이 배척한 것을 대비시켰다. 예수가 그들과 함께 이방인을 향해 개xx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러니까 예수의 이방인을 향한 치유와 구원을 그들은 거부했다. 설교자는 그들의 고정관념과 배척 행위가 유전되듯 이미 우리 속에 상존한다고 했다. 예수는 고향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람의 경계설정과 폐쇄된 마음을 깬다.  설교자는 신영복 선생의 마지막 강의를 예화로 들었다. 어느 노인이 자기 삶을 잘 포장해 각색했다. 노인의 실제 삶과 각색된 삶 사이에는 갭이 발생했다. 신영복 선생은 노인이 각색한 삶이 원래의/그렇게 되었어야 할 삶이고, 그의 실제 삶은 시대가 각색한 것이라고 했다. 신영복 선생의 혜안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창조 때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다. 그러나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할 정도로 망가졌다. 각색된 것이다. 예수는 이 괴리를 치유하고 회복시킨다. 예수의 관심이다.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The loveliness of Paris seems somehow sadly gay The glory that was Rome is of another day I’ve been terribly alone and forgotten in Manhattan I’m going home to my city by the bay I lef...

예수는 인간이 만든 피라미드 변종을 치유하고 해방의 해를 선포한다 (눅 4: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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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리스도교 일치주간을 기념하여 신부님과 수녀님, 그리고 개신교 목사님이 함께 예배를 드렸고, 신부님이 누가복음 4:14-21을 "처음처럼"이라는 제목으로 설교(강론)했다. 신부님이 개신교 주일예배에 참석하기가 쉽지 않은데 안식년을 맞이하여 가능했다.  설교자는 본문에 근거하여 교회, 아니 세상(세계)가 처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이 임해서 가능했다고 선언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 성령 강림을 통한 교회의 시작, 특히 당신의 사역 시작을 알리는 "성령이 임했다"는 예수의 말씀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처음"을 가리킨다.  반면 처음처럼, 첫단추 잘 끼기, 초심 유지라는 우리네 지혜의 말들은 그것이 유지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성찰이다. 반성이 쌓이고 쌓여서 인간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변질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인간의 구조, 조직, 사회, 국가는 피라미드화가 필연이다. 인간의 지배 욕구가 제어되지 못하면 노예화로 변질된다. 심지어 지배와 피지배 구조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변종도 나오는데, 그것은 피지배 욕구이다. 그렇다, 차라리 맞고 나면 푹 잔다. 성령으로 시작했으나 인간의 지속 불가능성 때문에 피라미드화가 진행되다가 결국 악마화 되고마는 흐름은 인간 역사를 수직으로 자르든 수평으로 자르든 늘 거기에 있다.   피라미드화가 진행되는 사회는 명령이 지배한다. 명령 사회의 특징은 생각 실종이다. 설교자는 루터의 종교개혁도 성령의 감동으로부터 시작된 것 아니냐고 했다. 그러나 현재 개신교회가 개혁의 초심을 유지하고 있는가를 되물었다. 물 마시듯 사람들을 죽인 이들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는 생각 실종의 극명한 작태는 여전하지 않은가.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잔치하는 곳으로 창조하여 인간을 초대했고, 그 세상을 서로를 위한 희생(거대하고 느릿느릿한 희생, 장자의 곤과 붕처럼 하도 커서 없다고 생각되는 희생)으로 유지되도록 만드셨다. 그러나 인간은 세상을 자신의 나라...

예수를 닮아가노라면 아무도 나를 업신여기지 못한다 (딛 2:11-15)

오늘 설교자는 디도서 2:11-15을 "아무도 너를 업신여기지 못하게"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설교자는 본문을 이렇게 분석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교육하면, 첫째, 신중해지고, 둘째, 의로워지며, 셋째, 경건하게 생활한다. 신중한 삶은 브레이크가 있는 생활이고, 의로운 삶은 약자에 대한 태도로 드러나며, 경건한 삶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교육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고백했다. 그 내용은 예수의 자기 헌신이다. 설교자는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 하나님의 교육이 이루어질지를 생각하자고 했다. 설교자는 기도라고 했다. 일상의 기도 장소와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육을 받아 열심히 예수를 닮아가보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