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말고 그분이 가리키는 어린 아이를 바라보자 (막 9:30-37)

오늘 설교자는 마가복음 9:30-37을 본문으로 '어린이(약자)가 우선인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설교자는 어린이를 약자의 대표로 설정했는데, 자구책이 없는 이를 약자로 정의했다. 설교자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아름다웠던 모습을 회복하자고 촉구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고아, 과부, 병자, 가난한 이들을 보살폈고, 특히 가난한 이들의 장례식을 치루어주었다. 1-2세기 로마의 압박 아래 살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왜 그런 데 관심을 두었을까? 

예수의 3단 논법 때문이다.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나를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구책이 없는 사람들을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을 믿었다. 설교자는 한국의 천도교(동학)에도 그런 비슷한 논리가 있음을 소개했다. 천도교가 세계 최초로 '아동 인권 선언'을 했다. 그 기초가 바로 '아이는 어린 한울님'이라는 사상이다. 손병희 선생이 천도교 3대 교주였는데, 그분 사위가 소파 방정환이다. 방정환 선생이 한국의 어린이 날을 제정한 컨텍스트가 '아이는 어린 한울님'이다. 

#우리는 곧잘 예수의 말씀, '첫째가 되고 싶으면 꼴찌가 되라'를 첫째가 되기 위한 처세와 투자로 왜곡한다. 이것은 예수의 뜻이 아니다. 예수는 그런 욕망 대신 어울려 살라고 당부했다. 사람의 욕망을 꿰뚫는 예수는 심지어 당신의 삼단논법에서 어린 아이와 자신을 동일시 했다.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려 하지 말고 보이는 부모를 섬기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섬기려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함을 우리보다 예수가 더 근본적으로 안다. 예수를 따르려 들면 우리는 반드시 실패한다. 예수는 어린 아이를 가리키고 있는데, 어린 아이를 보지 않고 예수를 쳐다보면 예수의 뜻에 어긋날 수밖에 없다. 

창세기 1-2장: 창조와 에덴동산

1-2장 창조와 에덴동산

성서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인간과 관계를 맺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창조 기사에서 하나님은 인간뿐 아니라 만물의 시작의 원인으로 고백되었다. 온 우주는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는다. 하나님은 특별히 인간을 당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했다. 이것은 하나님과 특수 관계를 맺고 싶은 인간의 소망의 표현이다.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하여 창조주로 고백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볼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현존이 핵심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종교적 인간의 최고 감정의 표현으로 제한될 수 없고, 인간의 종교심의 투사과 빚어낸 결과물도 아니다. 인간으로부터의 지침, 제도, 법은 오히려 덫일 뿐이다. 그것들은 인간의 기대와는 다르게 인간을 죄인이라 규정할 뿐이다. 그것은 죄의 쳇바퀴이다. 인간이 죄를 벗어나 하나님 섬김의 지침을 만들고 다시 그 규정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을 찍히는 영겁회귀의 쳇바퀴다. 하나님의 언행이 중요하다. 인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최고 심판인 지옥이든, 하나님의 최대 상인 천국이든 하나님의 다스림이 중요하다. 만유구원 요구에서 호혜평등을 추구하는 인간의 최대 선함이 드러난다. 하나님에 대한 최선의 기록인 성서는 만유를 어떻게 다루시는가. 창세기 1장은 인간은 인간, 하나님은 하나님을 진실하게 인정하면서, 그 하나님께 매달리는 인간의 소망을 담고 있다. 에덴동산은 그러한 소망이 현실화 된 공간이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하나님은 하나님인 채, 그리고 인간은 인간인 채 소통하고 장벽이 없다. 그야말로 그 곳은 꿈의 공간이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아돌프 폰 하르낙 추도사 (1930년 6월 15일)

지금 이 순간, 저와 함께 수천 명의 젊은 신학자들이 우리의 위대한 스승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돌프 폰 하르낙 선생님의 유산이 우리에게 전해졌고, 우리는 깊은 책임감 가운데 자랑스럽게 이를 계승합니다. 우리는 선생님과 함께 미래를 바라봅니다. 선생님이 우리 신학 세대에게 남긴 유산을 생각하며 말입니다.

선생님과 우리 사이에는 거의 두 세대의 간극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가장 충실한 제자들마저 이미 우리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을 오직 노년의 대가로만 알고 있으며, 온 학계가 주목하던 인물로 기억합니다. 선생님은 만나는 모든 이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켰고, 선생님의 삶은 진리의 정신과 투쟁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선생님은 어디를 가시든 하나의 세계를 함께 가져가셨으며, 선생님과의 만남은 누구에게나 지울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인물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던 신학자들로서 이를 큰 행운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이 세대의 많은 이들 중에서 특별하게 만드는 점입니다. 선생님은 우리의 스승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진정한 스승이 제자에게 다가가듯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와 함께 질문하며, 또한 탁월한 식견으로 우리를 이끄셨습니다.

선생님이 마지막 몇 년간 당신 자택에서 우리와 함께 했던 고대 교회사 연구 시간들은 선생님의 진리와 명확성을 향한 굳건한 열망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선생님의 세미나는 결코 피상적인 말장난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명확성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장 내밀하고 개인적인 질문들까지 다루어졌으며, 선생님은 언제나 경청하고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오직 진실한 답변만을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분명했던 것은, 진리는 오직 자유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자유로운 인식을 통해 얻은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싸우는 선구자임을 목격했습니다. 선생님은 늘 새롭고 자유로운 판단을 내렸고, 많은 이들이 두려움에 얽매여 있을 때도 그것을 분명히 표현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선생님은 학문 세계에서 모든 가식적인 교육과 고착된 편견을 초월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행동과 사람을 평가할 때 진정성을 중요하게 여기셨고, 이는 선생님이 모든 젊은 세대의 친구였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때로 선생님은 우려의 목소리를 내거나 우리 학문의 최근 동향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선생님은 다른 이들의 의견이 위협받을까 염려하셨고, 순수한 진리 추구에 불순한 것이 섞이는 것을 걱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생님의 따뜻하고 사려 깊은 보살핌 아래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선생님을 모든 진부함과 피폐함, 정신적 삶의 모든 고착화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방패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했습니다 - 신학자였으며, 그것도 자신의 소명을 깊이 인식한 신학자였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신학자였다는 사실을 통해서만 그분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선생님은 신학자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그분이 교리사를 저술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신학이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신학자의 사명은 이보다 작은 것이 없습니다.

하르낙이라는 신학자에게서 우리는 그분의 정신 세계의 통일성을 보았습니다. 그 통일성 속에서 진리와 자유는 진정한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그 조화가 없었다면 진리와 자유는 자의적인 것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 문제에 있어 항상 신중한 태도를 보이셨고 불필요한 말을 삼가셨습니다. 그러나 세미나 때 혹은 여름이면 그뤼네발트에서 가장 오랜 제자들과 가장 젊은 제자들을 모아 대화를 나눌 때, 선생님이 남긴 경구들은 우리에게 충분했습니다. 선생님은 성령 안에서 모든 시대정신이 자신의 소명을 찾는다고 믿었고, 아버지 하나님과 자녀인 인간 사이의 메시지가 영원한 진리이며,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진리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여기에 아돌프 폰 하르낙 선생님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 있습니다. 그것은 연구와 창조, 그리고 삶에 있어서 참된 자유 그리고 모든 사유와 삶의 근본적인 토대에서 비롯된 깊은 기반입니다. 저는 선생님이 즐겨 사용했던 말을 인용하며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이는 1년 전 여름 소풍에서 제자들에게 남긴 그분의 마지막 말이기도 합니다.

"주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기쁨이 넘치지 않을 수 없다."
(Non potest non laetari, qui sperat in Dominum)

In: D. DR. Agnes von Zahn-Harnack, D. DR. Axel von Harnack, Adolf von Harnack.  Aus gewählte Reden und Aufsätze, Walter de Gruyter, 1951, 210-211. 

자기 부인, 십자가, 예수 따름 (막 8:27-38)

오늘 설교자는 마가복음 8:27-38을 '자기 부인, 십자가, 예수 따름'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설교자는 본문의 내용(베드로의 고백)보다 그 고백의 장소를 소개하는 데 포커스를 집중했다. 본문의 장소는 가이사랴 빌립보로서 헤롯  대왕의 아들 빌립이 가이사를 위해 헌정한 도시다. 설교자는 마가복음 편집자(저자)가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트리거 정도로 보고, 그리스도와 가이사의 대비를 노리고 있다고 했다. 

베드로가 얼떨결에 제시한 그리스도에 대한 예수의 이해, 즉 예수의 그리스도 상은 가이사의 상과 대조된다. 설교 제목의 정반대가 가이사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 황제에게 자기 부인이 있는가? 황제에게 십자가가 있는가? 자기 부인은 고등종교의 대표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자기 부인은 고통, 수난을 선택해야 한다. 자기 부인은 각자에게 실존적이다. 부자 청년에게 자기 부인은 영생 관심이라는 청년의 기대와는 달리 재물 포기였다. 예수의 자기 부인은 십자가다. 예수를 뒤따르는 그리스도인 각자는 실존적 자기 부인과 예수의 말씀 대로 각자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설교자는 예수 따름에는 완성이 없고 다만 끊임 없는 수행만 있을 뿐임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예수가 베드로를 꾸짖은 이유가 이해된다. 베드로는 예수의 그리스도 상을 거절하고 그 길을 막아섰다. 가이사의 길을 가라고 예수의 등을 떠미는 베드로는 혼나야 한다. 

이것과 연속해서 설교자가 소개한 복음서에서 '인자'가 언급된 상황도 이해된다. 복음서에서 인자는 권위와 신성, 부활, 영광, 메시아적 사역을 거론할 때 언급됐다. 이러한 경우에는 신의 아들이 더 적합해보이는데 복음서 기자들은 인자를 선택했다. 그들은 예수의 그리스도 상을 집약한 단어가 인자라고 이해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믿음 소망 사랑

데살로니가전서 1장 
믿음 소망 사랑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 데살로니카전서는 바울이 데살로니카 교우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1장의 인사를 보면 바울의 뿌듯한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의 변화된 삶을 보는 뿌듯함입니다. 그들이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서 본이 되고 있는 상황을 보는 뿌듯함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나카 교우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믿음, 그 믿음을 삶에서 살아내는 사랑, 그리고 고단한 삶을 지탱하는 소망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전13장에서 말하는 믿음, 소망, 사랑이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삶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칭찬하며 흐뭇해하고 있습니다.

<믿음, 사랑, 소망>은 바울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기본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믿음과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자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랑, 다시 오실 예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그 속에서 희노애락의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들립니다.

믿음을 갖게 되는 일도 힘든 일이고, 그 믿음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일은 더 힘든 일이며,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을 행하며 살아가는 삶으로 인해 당하는 고통을 이겨내는 소망을 품는 것은 더욱 힘든 일입니다. 

이런 고난을 마다않고 살아내는 성도들을 보며 바울은 하나님이 택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말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카 성도들처럼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삶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 신실하신 하나님, 당신을 향한 믿음과 이웃을 향한 사랑, 예수님의 다시 오는 소망으로 그리도인의 본을 보이는 자가 되게 하소서! 성령님, 함께하소서. 아멘.

시편 41편: 여호와 라파

시편 41편 
여호와 라파


5.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그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의 이름이 언제나 없어질까 하며
6.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의 중심에 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널리 선포하오며
7.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하나같이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8. 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
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 욥기를 보면 병든 욥을 찾아온 친구들이 있습니다. 욥과 절친이라 할 수 있는 이들입니다. 욥을 위로하고 회개를 촉구하다가 욥을 비난하고 공격합니다. 

41편의 병든 시인도 욥과 유사합니다. 병든 시인은 욥과 달리 자신의 죄를 회개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에 대한 악담을 쏟아냅니다. 시인이 언제 죽을까? 시인의 이름이 언제 사라질까? 거짓을 말하며 널리 전합니다.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시인의 상에서 함께 떡을 나눠먹던 친구도 그에게 등을 돌립니다.

시인은 자신을 가난한 자라고 합니다. 몸은 병들어 고통을 감내하기 힘들고 이웃들과 친구들은 자신의 죽음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이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있을까요? 위로받고 격려받아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 가운데 있는 시인입니다. 

주위에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친구가 있나요? 지인이 있나요? 위로와 격려, 사랑의 전화를 한 통씩 합시다. 문자라도 합시다. 추석 명절도 가까워오는데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보내면 어떨까요?

♧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 질병으로 고통중에 있는 가난한 이들을 치유하여 주소서.새 힘이 솓아나게 하소서. 성령님, 진리로 인도하소서. 아멘.

내 모습 이대로 (고후 12:1-10)

고후 12:1-10
내 모습 이대로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1)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이 세상에는 힘 있는 자가 있는가 하면 연약한 자도 있고 지식이 많은 자가 있는가 하면 학식이 부족한 사람도 있으며, 돈을 많이 가진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같이 살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가진 재물을, 학벌이 좋은 사람은 학벌을, 권세를 지닌 사람은 자신의 권세를 자랑합니다. 반면 약자들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자랑이 강자들의 특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과 허물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자랑은 자식 자랑, 배우자 자랑, 출세 자랑, 돈 자랑, 힘 자랑이 아닙니다. 생뚱맞게도 바울 사도는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개척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나자 거기에 자칭 사도라 하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바울이 정성들여 전도한 복음의 내용을 왜곡시켰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말을 잘 했던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그들의 말을 바울의 가르침보다 더 낫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가르침을 “다른 복음”이라고 딱 잘라 말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점점 더해 갔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바울이 못 생겼다느니, 말이 어눌하다느니, 사도권을 인정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하며 더욱 바울을 공격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에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다시 방문했을 때, 그들이 바울을 인격적으로 모독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바울이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 삼층천까지 올라가서 환상을 보았다며 자랑처럼 들리는 말로써 자신의 억한 심정을 토로하지만, 금새 이런 것들은 다 부질 없는 일이라고 하며 자기는 자신의 연약함만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강함과 능력이 있음을 자랑하기는 쉽습니다. 대다수의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내세우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의 허물을 발설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조롱당하거나 멸시받기를 누가 바라겠습니까? 바울도 자기 육신의 가시가 다른 사람에게 조롱거리가 되니까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구하지 않습니까? 이렇듯 우리는 자기의 허물보다 강한 능력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째서 자신의 못난 점을 허물로만 보지 않고 오히려 자랑거리로 삼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바울이 자기의 약점을 순순히 인정하면서, 그것들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교만방지대책”이라 여길 수 있을까요?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하심이니라. ...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니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오히려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니라.”(고후 12:7-10)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sabeth Kübler-Ross)는 우리가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기까지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난 절대로 죽을 수 없다는 “부정”의 단계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죽음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당장 나에게 닥친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코앞의 죽음을 부정합니다. 둘째 단계는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자기가 믿는 신앙의 대상에게 항의하는 “분노”의 단계입니다. 신이나 그 누군가에게 분풀이를 하는 단계입니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 세 번째 단계에 이릅니다. 살 수만 있다면 정말 잘 살아 보겠다는 “타협”의 단계입니다. 세상이 이전과는 좀 달리 보이는 단계입니다. 다음 단계는 인생이 이렇게 허무할 수 있을까 하며 의기소침하고 침울해지는 “우울”의 단계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죽음을 담담하고 순순히 받아들이는 “수용”의 단계입니다. 

인간 바울은 육신의 가시를 놓고 하나님과 세 번 단판을 벌였습니다. 내게 왜 이런 고난의 씨앗을 주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부끄럽게 하십니까? 하며 바울은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내 병도 낳으면 나도 좋고 하나님도 좋은 게 아니냐며 낫게 해주시면 주님을 땅끝의 땅끝까지라도 전하겠다고 하며 타협도 시도했습니다. 이 두 단계를 거치고 나서 바울은 자신의 상황을 수용하는 기도를 드리며 이 사탄의 사자같은 내 육신의 가시는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라고 고백하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성경은 인간을 강하고 의로운 존재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약한 존재이고, 게다가 악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치 강한 듯, 의로운 듯 허세를 부립니다. 바울은 연약한 인간은 “주 안에서, 그리고 그의 능력의 힘 안에서 강해진다”(엡 6:10)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사야서가 가리키는 예수님의 모습도 힘 없는 모습입니다.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사 53:2-3). 

주님은 연약함 속에서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담대하고 강한 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3:4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 선포합니다.
허물과 연약함에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의롭다 믿고 자랑하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를 이렇게 비유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에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 그러나 세리는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예수님은 허물 많은 세리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지, 우리를 지배하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강한 자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고, 연약한 자가 하나님의 도움에 목말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식 자랑을 하겠습니까? 아니면 돈이나 학식을 자랑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누가 바울이 가졌던 육체의 가시가 내게는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당당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내세울 것이 없다면, 차라리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당신의 은혜로 여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가난한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 힘 없는 자, 연약한 자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하고, 하나님께 그 연약함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세 번 간구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 그 자체가 은혜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가시를 갖고 삽니다. 몸에 가시도 있고, 사람과의 관계에도 가시도 있고, 마음에도 가시가 있고, 신앙생활에도 가시가 있습니다. 자존심이 구겨지고 체면이 서지 않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우리의 허물만 들여다 보면 지옥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지옥과도 같은 우리의 현실에 손을 뻣으십니다.

나 스스로 나의 약함을 인정하거나 내 어두운 그늘과 화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허물이 많고, 특별히 뛰어난 것이 없고, 남들이 흠모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할지라도, 그런 나를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연약함을 지닌 나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바울이 스스로 자기의 가시와 화해하고나서 갑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할 만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성경을 꼼꼼히 살펴보면 바울만 세 번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이나 “할 수만 있거든 내게서 이 잔을 치워 주옵소서” 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예수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와 타협하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땀에 핏물이 배어 나오도록 세 번 기도하는 동안 하나님은 담담하게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연약한 어린 양의 모습으로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십자가에 달려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고 외치고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연약한 인간 예수를 부활시키십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러한 연약함 가운데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강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께 의존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간구할 때 약한 것 같지만 강합니다. 왜냐하면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힘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니라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습니다. “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때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한없이 약하고 실패로 보이는 예수님의 생애는 십자가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가 예수의 마지막 사건이라면, 성경은 모순된 사회구조에 맞서 용감하게 살았던 예수라는 사나이의 이야기 책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부활이 클라이막스이자 마지막 장입니다. 

나는 지금 몇 번째 단계에 있습니까? 절대로 죽을 수 없다고 부정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분노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타협을 시도하고 있습니까? 의기소침해서 우울해 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이 당신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바울도 예수님도 한 번만에 ‘내 육체의 가시는, 내가 져야만 하는 십자가는 나를 향한 아버지의 뜻이요 은혜’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세 번은 기도해야 도달할 수 있습니다. 시편 119:92을 묵상하며 바울과 예수님의 약함 속에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만납시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저희는 한 번도 당신께서 기뻐하는 일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실상 그럴 능력도 없었습니다. 
저희는 당신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 충성을 다하겠노라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당신과 맺은 약속을 성실히 지켜본 적이 없습니다.  
저희는 게으르고 나태했으며 
저희의 생명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에 집착했습니다.
사실상 저희는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희는 허물이 많은 인간이고, 
수많은 가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희의 모습을 받아 주소서.”
연약한 자에게 베푸신 은총을 통하여
당신 홀로 영광 받으소서.

시편 40편: 구원받은 자의 감사

시편 40편 
구원받은 자의 감사


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 추석 명절이 다가옵니다. 우리 교회는 추석 명절이 지난 22일 주일 추수감사주일예배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이면 추수한 다양한 곡식과 과일, 채소들로 강단을 가득 채워 풍성하게 꾸밉니다. 한 해 동안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얻은 것들을 주님께 감사예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농사를 짓는 성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올 한 해를 돌아보며 하나님께 드릴 감사의 제목을 생각하고 그것을 상징하는 물건을 상자에 담아 강단 앞에 놓기로 했습니다. 물건이 없으면 종이에 써서 상자에 넣기로 했습니다. 2024년을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동행하신 흔적들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언제나 함께하신 하나님, 항상 푸른 풀밭 쉴 만한 물가와 같이 평화롭지는 않았지만 세상 풍파 중에 함께해주신 하나님의 흔적을 찾아 감사하려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 기적이 셀 수 없이 많다고 하면서 받은 은혜에 감사를 드리고 싶어합니다.

6.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8.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9. 내가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난한 시인이 택한 감사의 방법은 제사나 제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의 법을 삶으로 풀어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행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감사는 구원자이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름진 소를 바치는 것보다 하나님의 공의를 심중에만 숨기지 않는 것이며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며 주의 사랑과 진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10). 

♧ 은혜로우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가 늘 생각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그 일을 말하고 전하게 하소서. 성령님, 진리로 인도하소서. 아멘.

시편 39편: 건강을 회복시켜주소서

시편 39편 
건강을 회복시켜주소서


5.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7.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 39편의 마지막 13절은 “나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소서”입니다. 13절을 읽기 전에는 용기없는 자의 넉두리로 읽힙니다.  “불의를 알지만 용기없어 입을 열지못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그림자같은 인생이라고 쓸모없는 인생이라고 넉두리를 늘어놓는구나.”

12-13절을 읽고 다시 첫 구절부터 읽으니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죽을 힘을 다해 하나님께 드리는 탄원의 기도가 느껴집니다. 시인은 질병이 극심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저주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달고 살았던 것같습니다. 그것을 후회하며 하나님께 회개하고 있습니다(1-3).

질병은 더욱 깊어지고 마음은 더욱 연약해지고 인생의 끝이 눈 앞에 있는 것 같아 작은 소리조차 낼 수 없는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인생이 허사요 그림자 같고 사라지는 안개처럼 느껴집니다(5-6). 질병으로 고통받는 시인에게 소망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건강을 회복시켜달라고 간구할 뿐입니다.

“동병상련”, “과부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 자기가 그 일을 겪어보지 않으면 그 사람의 마음을 모릅니다. 아파보지 않으면, 질병으로 절박해보지 않으면 의사의 필요성을 모릅니다. 

지금 이시각 촌각을 다투며 앰뷸런스 안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어딘가로 달리고 있을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 자비로우신 하나님,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에게 병든 자의 아픔을 함께 할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 지금 질병으로 촌각을 다투며 의사를 찾아달리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하나님이 지으신 귀한 생명이 소홀히 홀대받지 않게 하소서. 성령님,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

종교적 차별의 시작점으로서 하나님 소유 착각 (막 7:24-37)

오늘 설교자는 마가복음 7:24-37을 '차별의 벽을 넘어서다'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설교자는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해 마가복음 저자(편집자)가 상세하게 출신 성분을 밝힌 것은, 그녀가 비유대인이었음을 일부러 크게 드러내려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녀를 만나자 마자 '개'라고 한 것에 대해 설교자는 그때까지만 해도 예수는 유대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어느 학자의 견해도 소개했다. 부스러기를 먹는 개라는 말을 듣고 예수는 문학적으로 표현해서 구원을 받았다. 그러니까 예수는 유대를 넘어 이방까지 몸과 마음과 생각의 폭이 확장되었다. 예수는 좁은 유대 땅을 벗어났고, 엉성한 유대주의의 벽을 넘어섰다.

한편, 예수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개'라고 한 것을 사이코 드라마로도 볼 수 있다. 예수가 사이코 드라마의 원조다. 이 드라마는 여인에게 치유의 드라마가 됐다. 사이코 드라마는 자기의 현위치를 수용할 때 치유가 시작된다.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는다는 여인의 말을 통역하자면, 개새끼 소리를 들어도 사람 아닙니까? 하나님은 개새끼는 사랑하지 못하는 능력 없고 속 좁아 터진 분입니까? 라는 말이다. 여인은 진짜 자기의 현위치를 확인했다. 

종교적 차별의 시작은 어디부터일까? 내가 하나님을 소유하고 싶은 열망을 넘어 근거 없는 자존감이 될 때부터다. 그때부터 차별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실행된다. 예수가 수로보니게 여인더러 개라고 했다고 예수 옆에 서서 개새끼를 외치면 안 된다. 그나저나 예수 때도 개새끼, 요즘도 개새끼다. 혐오 발언의 원탑인 개새끼의 역사는 2000년도 더 됐다. 요즘 멍멍이들 인기가 치솟고 있다. 개새끼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조처라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