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9장: 파멸의 자리를 연단의 기회로 바꾸시는 신비

출애굽기 9장: 파멸의 자리를 연단의 기회로 바꾸시는 신비 "그래도 임금님과 임금님의 신하들이 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 주님께서 모세를 시켜 말씀하신 대로, 바로는 고집을 부리며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지 않았다." (출애굽기 9:30, 35, 새번역) 모세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 경고가 파라오에게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또다시 거절로 끝나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릅니다. 결과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말씀을 전해야 하는 무력감, 어쩌면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반복일 뿐인 그 길을 모세는 묵묵히 걸어갑니다. 초기의 모세가 결과에 일희일비했다면, 지금의 모세는 자신의 판단을 멈추고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거룩한 수동성을 배운 것입니다. 이 장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파라오를 통해 인간성의 극한을 마주합니다. 파라오의 문제는 무지가 아닙니다. 그는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충분히 인지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굳은 마음은 지적 동의를 넘어 의지적 굴복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분의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함을 알기에,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밟고 일어서려 합니다. 파라오는 괴물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스스로 왕이 되려는 모든 아담의 후예, 곧 우리 인간의 전형입니다. 여기서 묵직한 질문이 솟아오릅니다. "만약 파라오의 자리에 나를 대입한다면,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다루실 것인가?" 파라오와 우리의 결정적 차이는 이 질문을 던지는 태도에 있습니다. 자신의 완악함을 인지하고 괴로워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파멸이 아닌 연단을 선물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존재를 밟고 일어서려는 자를 내버려 두어 심판하시지만, 고집을 부리면서도 하나님을 놓지 못하는 자녀는 그가 딛고 선 아집의 다리를 무너뜨려서라도 품으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은 우리를 부수기 위함이 아니라, 딱딱하게 굳은 자아를 녹...

출애굽기 8장: 신비 앞의 노출, 인간 한계의 심연을 비추다

출애굽기 8장: 신비 앞의 노출, 인간 한계의 심연을 비추다 바로가 대답하였다. "내일이다." 모세가 말하였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 우리의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드리겠습니다. ... 마술사들이 바로에게 그것은 신의 권능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바로는 여전히 고집을 부리고,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 그러나 이번에도 바로는 고집을 부리고, 백성을 보내지 않았다." (출애굽기 8:10, 19, 32, 새번역) 전능하신 창조주가 고작 개구리와 이, 파리 떼를 동원하여 인간과 싸우는 장면은 어딘가 어색합니다. 기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드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방식이자 한계의 노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유치한 방법으로 당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무능이 아니라,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인간의 눈높이까지 내려오신 하나님의 자기 비하(Kenosis)의 흔적입니다. 하나님은 고고한 방식을 고집하지 않으시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언어인 재앙을 사용하여 대화를 시도하시는 슬픈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집트의 마술사들입니다. 일반인보다 영적인 민감성을 갖춘 그들은 기술의 영역을 넘어선 불가항력적 임재 앞에서 "이것은 신의 권능(손가락)이니이다"라고 고백하며 멈춰 섭니다. 귀신이 예수를 먼저 알아보듯, 그들은 피조물의 한계를 직감한 것입니다. 그러나 파라오는 멈추지 않습니다. 파라오의 완악함은 단순히 개인의 나쁜 성품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는 제국의 시스템을 수호해야 하는 최고 통치자입니다. 노예 노동력의 상실은 곧 국가 경제와 시스템의 붕괴를 의미하기에,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치 지도자로서 그는 합리적이고도 이기적인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파라오는 자신이 만든 견고한 이익의 시스템에 갇혀 명백한 신의 손가락 앞에서도 계산기를 두드리는 인...

출애굽기 7장: 변수를 삼키는 상수, 기적의 참된 표징

출애굽기 7장: 변수를 삼키는 상수, 기적의 참된 표징 "바로가 너희에게 이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거든, 너는 아론에게 지팡이를 바로 앞에 던지라고 하여라. 그러면 지팡이가 뱀이 될 것이다 ...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바로가 고집을 부리고,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 그런데 이집트의 마술사들도 자기들의 술법으로 그와 똑같이 하니,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바로가 고집을 부리면서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출애굽기 7:9, 13, 22, 새번역) 고대 사회에서 신의 존재는 기적으로 가늠되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들은 신의 몫으로 여겨졌고, 그것이 곧 신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7장은 이 도식에 균열을 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지팡이가 뱀이 되는 이적, 그리고 물이 피가 되는 재앙을 이집트의 술사들도 똑같이 흉내 냈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뱀이 되고 물이 피가 되는 것은 21세기 과학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지만, 당시 술사들은 그것을 실행했습니다. 만약 기적의 기준이 단순히 인간의 불가능성이나 초자연적 현상에 있다면, 이 대결에서 하나님의 유일성은 증명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보지 못하는 장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를 '기적'이라 부르며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존재를 기적의 유무에 맡기면, 하나님을 스위치처럼 껐다 켰다(On/Off) 하는 0.1%도 모르는 소치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우리가 듣지 못하는 지구의 자전 소리처럼, 우리의 인지 영역 너머에 항상 계시는 '상수(Constant)'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존재가 기적 쇼(Show)에 따라 점멸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인간도 흉내 낼 수 있는 지팡이와 피의 카드를 먼저 꺼내 드셨을까요? 성서는 이 사건이 단순한 물리적 대결(Fact)이 아니라 신학적 의미를 담은 표징임을 보여줍니다. 핵심은 변화가 아니라 삼킴에 있습니다. ...

출애굽기 6장: 입이 둔한 자를 덮치는 하나님의 이름

출애굽기 6장: 입이 둔한 자를 덮치는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나는 주다. 너는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모두 이집트의 임금 바로에게 전하여라' 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주님께 이렇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입이 둔하여 말을 할 줄 모릅니다. 바로가 어찌 저의 말을 듣겠습니까?'" (출애굽기 6:2, 29-30, 새번역) 하나님은 모세의 볼멘 기도에 응답하여 당신의 이름을 다시금 천명하십니다. "나는 주(여호와)다!" 이는 단순한 자기소개가 아닙니다. 족장들에게는 '전능한 하나님'으로만 알려졌던 그분이, 이제는 언약을 반드시 성취하는 신실한 여호와로서 모세의 등 뒤를 받치겠다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압도적인 계시 앞에서도 모세는 주저앉습니다. "저는 입이 둔하여 말을 할 줄 모릅니다." 모세는 이 장에서 두 번이나 뒷걸음질 칩니다. 모세의 이 거절은 얄팍한 겸양이 아닙니다. 그것은 처참한 실패(5장)를 겪은 자의 진솔한 자기 존재 해석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했으나 결과는 노역의 가중이었고, 동족들은 등을 돌렸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않는데, 하물며 파라오가 듣겠습니까?"라는 모세의 반문은 너무나 논리적이고 현실적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인정하며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겠습니다"라는 말보다 "나는 못 갑니다"라는 말을 꺼내는 것이 훨씬 더 고통스러운 패배자의 심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합니다. 4장에서 핑계를 대는 모세에게 진노하셨던 하나님이, 6장에서는 침묵하십니다. 아무런 질책도 경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입에서 나온 거절의 말보다 그 말이 튀어나온 상처 입은 심장을 꿰뚫어 보시기 때문입니다. 오히...

출애굽기 5장: 값싼 섭리와 거룩한 '어찌하여'

출애굽기 5장: 값싼 섭리와 거룩한 '어찌하여' "파라오가 대답하였다. '주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주를 알지도 못하고, 이스라엘을 보내지도 않겠다.' ... 너희가 이스라엘 자손을 굽어살피시는 주님께 엎드려 빌기를 '칼이나 전염병으로 우리를 치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고 빈다지만, 너희에게 내릴 벌은 바로 이것이다. ... 모세는 주님께 돌아와서 호소하였다.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이 백성에게 이렇게 괴로움을 겪게 하십니까? 정말, 왜 저를 이 곳에 보내셨습니까? ...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주님의 백성을 구하실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계십니다.'" (출애굽기 5:2, 3, 22-23 부분 발췌, 새번역) 야심 차게 바로 앞에 섰던 모세는 처참한 패배를 맛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면 바로가 두려워 떨 줄 알았으나, 돌아온 것은 "야훼가 누구냐?"라는 조소뿐이었습니다.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습니다. 짚도 주지 않고 벽돌 수는 그대로 채우라는 가혹한 명령이 떨어졌고, 동족들은 모세를 향해 저주를 퍼붓습니다. 혹을 떼려다 하나 더 붙인 격입니다. 모세는 지금 당혹감과 배신감, 그리고 무력감이라는 삼중고 속에 갇혀 있습니다. 이 난감한 5장의 현실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 해석의 갈림길에 섭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는 만능키를 사용하여 이 모든 상황을 즉각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이 고난도 다 하나님의 큰 그림이야." "바로의 완악함도 예정된 섭리야." 틀린 말은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정답입니다. 그러나 이 정답을 너무 일찍 꺼내 드는 것은 위험합니다. 고통의 현장에서 치열한 고민 없이 내뱉는 '섭리'는 진통제가 아니라, 영혼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값싼 섭리(Cheap Providence)'가 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4장: 낮아지신 하나님과 할례

출애굽기 4장: 낮아지신 하나님과 할례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이렇게 해서 이적을 보여 주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너에게 나타난 것을 믿을 것이다.'... 모세가 길을 가다가 어떤 숙소에 머물러 있을 때에,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다... 십보라가 부싯돌을 가지고 와서, 자기 아들의 포피를 잘라 모세의 발에 대고 '당신은 나에게 피 남편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백성이 그들을 믿었다. 그들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굽어살피시고 그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셨다는 말을 듣고, 엎드려 주님께 경배하였다." (출애굽기 4:5, 24-25, 31 부분 발췌, 새번역) 떨기나무 불꽃 앞에서의 소명은 이제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로 넘어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손에 이적을 쥐여주십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고, 손이 나병에 걸렸다 낫습니다. 사람들은 이 불가해한 사건을 보며 신의 개입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 이적들은 하나님의 힘자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의 눈높이로 자신을 구겨 넣으신 '케노시스(Kenosis, 자기 비하)'입니다. 마치 부모가 옹알이하는 아이와 소통하기 위해 혀 짧은 소리를 내듯,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뜻을 저잣거리의 마술 같은 방식으로라도 전하려 하십니다. 이적은 능력의 과시가 아니라, 어떻게든 백성을 설득하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낮아지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로운 동행 뒤에는 서늘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다"(24절). 문맥상 너무나 뜬금없어 보이는 이 구절은 읽는 이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방금 전까지 이집트로 가라고 등 떠미신 하나님이 왜 길 위에서 그를 죽이려 하시는가? 이 난해함 속에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처절한 역사적 고뇌가 서려 있습니다. 나라를 잃고 바벨론 강가에서 울던 포로기의 저자들에게 망국의 원인은 힘의 부재가 ...

출애굽기 3장: 타지 않는 불꽃 속으로, 무한이 유한을 품다

출애굽기 3장: 타지 않는 불꽃 속으로, 무한이 유한을 품다 "모세가 그것을 보려고 오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 (출애굽기 3:4, 11, 14 부분 발췌, 새번역) 침묵의 강물 위를 떠돌던 질문이 마침내 답을 얻는 순간입니다. 미디안 광야의 황량함 속에서, 타오르되 소멸하지 않는 기이한 떨기나무가 모세의 시선을 붙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을 거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이 부르심은 태초의 에덴동산을 떠올리게 합니다. 죄를 짓고 두려워 나무 뒤로 숨었던 아담을 향해 "네가 어디 있느냐" 찾으시던 그 음성입니다. 아담은 숨었지만, 모세는 타지 않는 불꽃을 향해 발걸음을 옮깁니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거룩한 호기심으로 나아가는 이 장면은, 단절되었던 신과 인간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만남은 모세에게 당혹스럽습니다. 40년 전, 왕자의 권력을 쥐고 자신의 힘으로 민족을 구원하려 했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오히려 그 실패로 인해 모든 희망을 내던지고 스스로를 미디안의 양치기로 규정하며 체념 속에 살아가던 지금, 하나님은 불쑥 찾아와 "가라"고 하십니다. 묻어두었던 생채기가 다시 들춰집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그 일을 합니까?"(11절). 이것은 겸손을 넘어선 항변입니다. 자신의 능력이 충만했을 때는 가만히 계시다가, 이제 와서 무능한 노인이 된 자신에게 왜 이러시느냐는 뼈아픈 외침입니다. 인간의 끝자락이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시작이 열린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