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6장 : 어김 없으신 분

호세아 6장 
어김 없으신 분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 호세아 선지자가 외치는 핵심은 “돌아감”입니다. 돌아감은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90도가 아니라 180도 돌아서는 것입니다.

아들이 레고를 즐겨합니다. 2-3시간 꼼짝 않고 앉아서 집중하는 모습이 대견합니다. 더 대견한 것이 있습니다. 조립을 하다보면 레고 조각의 방향이 틀리거나 꽉 견고하게 끼우지 못해서 부서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애써 조립한 것을 다시 해체하고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고 다시 조립을 해야 합니다. 꼼짝 않고 앉아서 공들인 것을 해체하고 다시 시작하는 아들을 보면 참 대견합니다. 화가 나지만 참고 다시 시작하는 아이가 참 대견합니다. 해체하고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원하는 완성된 멋진 레고를 가질 수 없습니다.

호세아는 어디서부터 방향이 잘못되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돌아서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고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방향으로 그대로 내달리다가는 낭떠러지로 떨어져 뼈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방향을 전환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호세아는 “돌아감”의 이유, 방향을 바꾸어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김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칠흑같고 긴 밤이라도 새벽 빛은 찾아옵니다. 매일 어김 없이 떠오르는 태양처럼 어김 없으신 분입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런 어김 없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방향으로 달리고 있나요? 혹 갈 방향을 몰라 헤매고 있지 않으신가요? 멈추시고 잠시 숨을 고르고 하나님을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 선하신 하나님, 삶의 방향이 당신을 향하게 하소서. 당신이 어떤 분인지 분명히 알고 변함없이 당신을 향하게 하소서. 성령님, 진리로 인도하소서. 아멘.

그리스도를 향한 분별력 있는 복종 (요 18:33-38)

오늘 설교자는 요한복음 18:33-38을 '그리스도를 향한 분별력 있는 복종'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설교자는 도로테 죌레의 책, '단순한 복종을 넘어'(Beyond Mere Obedience)를 소개하며 분별력을 갖고 참 진리요 참 왕이신 예수께 복종하자고 설교했다. 그렇게 살았던 사람으로 설교자는 전태일을 소개했다.  

이제부터 내 생각: 

오늘의 핵심 키워드는 '분별력'이다. 단순한, 생각 없는 복종이 아닌 분별력 있는, 자발적 복종을 가능케 하는 분별력이다. 유대 지도자 그룹은 예수를 빌라도에게 재판 받게 함으로써 상실한 분별력을 노출하고 말았다. 빌라도 또한 황제를 들먹이는 그들의 압력에 굴복해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고 분별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들은 왜 분별력을 상실하고 말았을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늘나라의 왕인 줄 몰라서? 모르는 게 당연하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툭 내뱉자 예수님은 그것 네가 알고 하는 말이 아니라고 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유대 지도자들과 빌라도가 분별력, 곧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리와 권한을 상실했던 것은 자기 유익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빌라도에게선 그가 총독으로서 황제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도리어 자신의 권한 상실을 초래했고, 유대 지도자들에게선 예수 죽이기에 혈안이다보니 할 짓 못할 짓 분간하지 못하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한을 이상한 데로 표출하고 말았다. 둘 다 자기 유익에 단순 순응하며 분별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예수에게 분별력 있게 복종합시다'도 단순 복종이 될 수 있다. 십자가에 능력이 있다고 하여 드라큘라에게 십자가를 내보이면 피를 보고야 만다. 예수가 지신 십자가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 내 손에 든 십자가는 단지 형태만 십자가일 따름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 충만한 단어 앞에서 분별력을 상실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다. 다만 우리는 이것이 나의 유익인가 아닌가를 그때그때 판단하고 선택할 따름이다. 그러한 선택에서 우리는 죌레가 말한 단순한 복종을 넘어설 것이다.

호세아 4장 : 하나님의 고소

호세아 4장 
하나님의 고소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2.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논쟁을 벌이십니다. 논쟁/변론으로 표현된 이 단어는 소송이나 변론을 위해 사용되는 법정 용어라고 합니다(출23:2.3.6;신21: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소송하셨는지 구구절절 이야기하십니다.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 간음뿐이며 피가 철철 흘러 넘친다고 합니다. 이러니 어찌 고발을 하지않으실수 있겠습니까?

더 안타깝고 슬픈 일은 그 일들을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이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어야 할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백성들을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번성할 수록 하나님을 향한 범죄가 늘어난다고 한탄하십니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많아지면 범죄가 줄어들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져야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나라에 더 가까운 사회가 만들어져야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번성할 수록 범죄가 늘어납니다.

교회가 가장 흥했던 중세를 암흑기라고 부르는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요? 큰 교회 건물, 많은 신도들, 아름다운 찬양과 퍼포먼스들…하나님을 향한 거룩함을 빙자한 것들 뒤에 가려진 온갖 악행들을 하나님은 고소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하면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 나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나를, 우리를 고소하고 계시지는 않을까?

♧ 자비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소박하지만 진실한 교회, 작지만 힘 있는 교회, 적지만 나누는 교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 이루게 하소서. 성령님, 진리로 인도하소서. 아멘.

호세아 2장(#2) : 그 날에는

호세아 2장(#2) 
그 날에는

18.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19.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23.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 어제 밤 늦게 뉴스 속보를 읽었습니다.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이스라엘의 총리 네타냐후와 하마스의 관계자들에게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는 소식입니다. 13개월이 넘게 지속되고 있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가자지구 전쟁은 희생자가 44,0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가자지구 전쟁의 양쪽 책임자들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한 것입니다. 이 영장이 강제력이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18절 후반절에 하나님은 이 땅에 활과 칼을 꺽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을 평화롭게 눕게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사람들에게 만이 아니라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맺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호세아는 내연남과 떠나버린 고멜을 타일러(설득하여) 다시 데려오려고 합니다. 무서운 협박을 하지만 그녀와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상 바알에게로 떠나버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고 계획입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오는 그 날에는, 관계가 회복되는 그 날에는, 전쟁이 사라지고 평안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공의, 정의, 은총, 긍휼,진실함으로 남편 역할을 하실 것입니다(19-20). 이것은 이스라엘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자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그 날에는> 전쟁이 멈추고 피조물이 모두 평안을 얻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그 날에는> 모든 피조물이 처음 창조된 그 날처럼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던 <그 날>이 속히 회복되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가자지구와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 끝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 공의와 자비의 하나님, 전쟁이 속히 끝나도록 하여주소서. 공의와 긍휼을 베푸소서. 성령님, 진리로 인도하소서. 아멘.

호세아 2장 : 내가 더하여 준 것이다

호세아 2장 
내가 더하여 준 것이다

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 호세아는 자녀들에게 어머니를 고발(논쟁)하라고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더 강력하게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결혼하여 세 자녀를 낳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정분이 났습니다. 정분 난 남자가 떡과 물과 양털과 삼과 기름과 술을 준다고 따라갔습니다(5).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정분난 남자를 따라갔습니다(13).

호세아는 이런 고멜을 협박합니다. 음행을 버리지 않으면 태어날 때처럼 벌거 벗길 것이며,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목말라 죽게 하며, 자녀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다(3-4). 호세아는 고멜에게 “네가 가지고 있는 곡식과 새 포도주, 기름은 내가 준 것이다. 당신이 내연남에게 준 금은 내가 준 은으로 만든 것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합니다.

1-13절의 호세아의 협박은 애원하는 것 같습니다. 세 아이를 위하여 돌아와 달라고 간청하는 것 같습니다. “너를 풍요롭게 해주겠다고 유혹하는 말에 넘어가지 말라. 네게 가진 모든 것은 내가 해준 것이다. 똑바로 알아라!” 호세아는 고멜의 무지를 깨우치고 돌아오게 하려고 애절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 풍요로움을 찾아 바알에게로 간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예로 살고 있는 이들에게 가나안으로 이끄셔서 땅을 주셨습니다. 자유도 주셨고 왕국을 세워주셨습니다. 또 풍성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공을 엉뚱하게 바알에게 돌리며 감사하고 바알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와 고멜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하고 계십니다. 돌아오라고! 집 떠나 불량한 곳에 있는 자녀에게 돌아오라고 애원하는 부모의 심정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혹시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삶은 아닌가요?

♧ 자비로우신 하나님, 어리석음을 깨우치시고 바른 길 가게 하소서. 당신이 나의 구주이심을 망각하지 않고 감사하게 하소서. 성령님, 진리로 인도하소서. 아멘.

호세아 1장 :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

호세아 1장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

2.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따르기 힘든 명령을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 나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 나라 이스라엘이 음란하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예언자 호세아에게 이 나라의 죄를 짊어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예언자의 임무가 무엇인지 보여집니다.

하나님은 아이들 이름까지 지어주십니다. 
첫째는 “이스르엘”, ‘하나님이 씨를 뿌리신다, 하나님이 심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일상적으로 이 표현은 풍요, 번영, 다산을 의하지만 때로는 심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혹독한 운명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로루하마”, ‘긍휼을 받지 못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으로 돌보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로암미”,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의미로 모세와 세운 언약을 파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호세아의 세 딸 이름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 계획이 얼마나 확고한지 보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음란한 이스라엘,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가 보입니다.

이 분노가 어떻게 이루어질지, 딸들의 이름처럼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는지, 조롱과 멸시를 당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다시 묵상하게 됩니다.

“호세아”라는 이름은 예수라는 이름과 같은 의미입니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호세아에게 주어진 임무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떨어진 백성들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고통을 짊어지고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이십니다(10-11).

하나님을 버리고 음란(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백성들이 “로루하마, 로암미”가 된 것처럼 우리도 그런 진노의 한 중간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 선하신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이 로루하마, 로암미 된 것을 반면교사로 삼게 하소서. 선지자, 하나님의 동역자의 임무가 무엇인지 다시 마음에 새기게 하소서. 성령님, 진리로 인도하소서. 아멘.

디모데후서 4장 : 떠날 시간이 가까웠을 때도

디모데후서 4장 
떠날 시간이 가까웠을 때도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12.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 바울의 마음의 강직함과 그리움과 떨림이 느껴집니다. 주님께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쉼 없이 달려온 인생입니다. 이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마치고 떠날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는 바울입니다.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4:6-7)

바울은 감옥에서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며 디모데가 그립습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남은 힘을 다하여 사역을 위한 격려와 필요한 훈계들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아마도 디모데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커졌을 것입니다.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는 누가처럼 곁에 있는 사람도 있고, 사역을 위해 떠나간 그레스게와 디도도 있고, 세상을 사랑하여 자신을 버리고 떠나간 데마도 있습니다. 또한 멀리 에베소에서 자신을 찾아와 위로하고 격려하는 오네시보로와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평생 복음을 함께 전했던 동역자들도 회상했을 것입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며 수없이 많은 위기와 어려움과 고난들을 이겨냈던 일들도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감옥에서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순간들을 보내고 있는 바울의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그런 바울이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떠나고 없는 로마에 복음을 전할 일꾼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디모데를 부르기 위해 감옥에서 외롭고 힘들겠지만 두기고를 에베소로 보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아마 바울은 누가와 디모데, 마가에게 자신이 떠나고 없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기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바울입니다.

♧ 선하신 하나님, 바울과 같은 강직하고 성실한 마음을 주소서. 마지막까지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게 하소서.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는 자가 되게 하소서. 성령님, 진리로 인도하소서. 아멘.

디모데후서 3:12 :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

디모데후서 3:12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바울이 살던 시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여 고난을 받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때로는 믿는 사람들에게도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이유는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요즘 교회와 기독교는 세상으로부터 많은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보면 선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자신의 신앙을 밝히기를 꺼려하는 것을 보아도 비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요즘 그리스도인들도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요즘 이런 고난은 왜 받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았기 때문일까요? 바울의 훈계처럼 한 아내의 남편으로 충실했기 때문일까요?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고 정직했기 때문일까요? 관용과 신중함으로 타인을 대하고 나그네를 대접했기 때문일까요?

만약에 이런 것들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면 기독교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계속 그렇게 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삶이고, 그 삶을 따라가는 제자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바울도 칭찬하며 자랑스러했을 것입니다.  

♧ 선하신 하나님,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하소서. 예수 안에서 사랑과 정의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난을 기뻐하게 하소서. 성령님, 진리로 인도하소서. 아멘.

시대를 꿰뚫는 날카로운 눈과 가슴으로 깨어 신앙생활 하자 (막 13:1-8)

오늘 설교자는 마가복음 13:1-8을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을 때'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본문이 속한 마가복음 13장은 마가의 묵시록이다. 설교자는 묵시를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어야 낭패를 보지 않는다고 했다. 본문은 AD 66년부터 시작된 유대와 로마의 전쟁 중에 집필되며, 특히 70년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예언의 형태로 담고 있다. 당시는 난세에 영웅들이 등장하듯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내에 자칭 메시아들이 등장했다. 집필자는 본문에서 그런 메시아들이 이 난세를 종결(종말)짓지 못한다고 내다봤다. 오히려 이런 혼란한 상황에 휩쓸리지 말고 깨어 있으라고 당부했다. 

그렇다면 어느 때에, 누가 상황을 정리할 것인가? 예수가 곧 정리한다는 견해는 긴 시간을 품고 있고, 예수가 이미 정리했다는 견해는 여전히 이미-아직 아니의 딜레마를 해결 못했다. 마가 편집자가 깨어 있으라가 예수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한 것이라면, 깨어 있음은 시대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눈과 마음을 품고 변혁의 삶을 요구한다. 깨어서 윤리 메시지로 갈 것인가, 졸면서도 윤리 메시지로 수렴될 것인가? 기독교의 메시지의 끝은 윤리로만 수렴되어야 하는가. 윤리가 기독교의 버킹검인가. 나의 신학적 고민이다. 

디모데후서 2:14-26 : 옳게 분별하고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

디모데후서 2:14-26 
옳게 분별하고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

14.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 저에게 참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말이 있습니다.

 “유익이 하나도 없고 듣는 자들을 오히려 망하게 함이라”(14)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17)

거짓 교사들이 하는 말은 듣는 성도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악성 종양처럼 그들을 죽음으로 이끌어 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전혀 유익함이 없는 말들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논쟁하며 말다툼하는 것을 경계하며 금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을 망하는 길로 인도하지 않고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전하고 부끄러울 것이 없는 구별된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가 참 교사입니다.

열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른 말씀과 그에 맞게 살아가는 구별된 삶입니다. 아무리 열정적인 열심으로 전한다 해도 전하는 말씀이 바르지 않은 것이라면, 단지 자신을 높이기 위한 선포라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구별된 경건한 삶이 없다면 무엇으로 모범을 보여 성도들을 바로 세우겠습니까? 

강단에 서서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명심 또 명심해야 겠습니다. 성도들을 망하게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바울은 다양한 재질의 그릇 비유를 통해서 성도들의 구별된 삶을 이야기합니다. 금/은/질그릇의 재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인이 쓰려고 할 때 쓸 수 있도록 준비된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금이냐 은이냐 흙이나 그릇의 재질을 중요시 하지만 하나님은 재질보다 그릇의 상태를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성돌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항상 준비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무익한 변론이 아니라 분별된 바른 지식과 부끄러울 것이 없는 구별된 삶으로 준비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더 크고 화려한 그릇이 아니라 더 깨끗하고 거룩한 그릇이 귀하게 쓰임 받습니다.

♧ 선하신 하나님, 무익한 논쟁을 일삼지 않게 하시고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고 전하게 하소서. 깨끗하고 구별되게 준비된 그릇이 되게하소서. 성령님, 진리로 인도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