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책
성경 읽기, 설교, 신학 공부
호세아 6장 : 어김 없으신 분
그리스도를 향한 분별력 있는 복종 (요 18:33-38)
오늘 설교자는 요한복음 18:33-38을 '그리스도를 향한 분별력 있는 복종'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설교자는 도로테 죌레의 책, '단순한 복종을 넘어'(Beyond Mere Obedience)를 소개하며 분별력을 갖고 참 진리요 참 왕이신 예수께 복종하자고 설교했다. 그렇게 살았던 사람으로 설교자는 전태일을 소개했다.
이제부터 내 생각:
오늘의 핵심 키워드는 '분별력'이다. 단순한, 생각 없는 복종이 아닌 분별력 있는, 자발적 복종을 가능케 하는 분별력이다. 유대 지도자 그룹은 예수를 빌라도에게 재판 받게 함으로써 상실한 분별력을 노출하고 말았다. 빌라도 또한 황제를 들먹이는 그들의 압력에 굴복해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고 분별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들은 왜 분별력을 상실하고 말았을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늘나라의 왕인 줄 몰라서? 모르는 게 당연하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툭 내뱉자 예수님은 그것 네가 알고 하는 말이 아니라고 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유대 지도자들과 빌라도가 분별력, 곧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리와 권한을 상실했던 것은 자기 유익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빌라도에게선 그가 총독으로서 황제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도리어 자신의 권한 상실을 초래했고, 유대 지도자들에게선 예수 죽이기에 혈안이다보니 할 짓 못할 짓 분간하지 못하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한을 이상한 데로 표출하고 말았다. 둘 다 자기 유익에 단순 순응하며 분별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예수에게 분별력 있게 복종합시다'도 단순 복종이 될 수 있다. 십자가에 능력이 있다고 하여 드라큘라에게 십자가를 내보이면 피를 보고야 만다. 예수가 지신 십자가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 내 손에 든 십자가는 단지 형태만 십자가일 따름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 충만한 단어 앞에서 분별력을 상실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다. 다만 우리는 이것이 나의 유익인가 아닌가를 그때그때 판단하고 선택할 따름이다. 그러한 선택에서 우리는 죌레가 말한 단순한 복종을 넘어설 것이다.
호세아 4장 : 하나님의 고소
호세아 2장(#2) : 그 날에는
호세아 2장 : 내가 더하여 준 것이다
호세아 1장 :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
디모데후서 4장 : 떠날 시간이 가까웠을 때도
디모데후서 3:12 :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
시대를 꿰뚫는 날카로운 눈과 가슴으로 깨어 신앙생활 하자 (막 13:1-8)
오늘 설교자는 마가복음 13:1-8을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을 때'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본문이 속한 마가복음 13장은 마가의 묵시록이다. 설교자는 묵시를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어야 낭패를 보지 않는다고 했다. 본문은 AD 66년부터 시작된 유대와 로마의 전쟁 중에 집필되며, 특히 70년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예언의 형태로 담고 있다. 당시는 난세에 영웅들이 등장하듯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내에 자칭 메시아들이 등장했다. 집필자는 본문에서 그런 메시아들이 이 난세를 종결(종말)짓지 못한다고 내다봤다. 오히려 이런 혼란한 상황에 휩쓸리지 말고 깨어 있으라고 당부했다.
그렇다면 어느 때에, 누가 상황을 정리할 것인가? 예수가 곧 정리한다는 견해는 긴 시간을 품고 있고, 예수가 이미 정리했다는 견해는 여전히 이미-아직 아니의 딜레마를 해결 못했다. 마가 편집자가 깨어 있으라가 예수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한 것이라면, 깨어 있음은 시대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눈과 마음을 품고 변혁의 삶을 요구한다. 깨어서 윤리 메시지로 갈 것인가, 졸면서도 윤리 메시지로 수렴될 것인가? 기독교의 메시지의 끝은 윤리로만 수렴되어야 하는가. 윤리가 기독교의 버킹검인가. 나의 신학적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