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을 품은 고난 상속 (고후 4:16-18)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예수님처럼 고난을 상속받는다. 다만 그 상속받은 고난은 그 속에 영광을 품고 있는 고난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부활도 상속받았다.

고후 4:16-18
영광을 품은 고난 상속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낙심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이유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바울은 두 가지 이유를 듭니다. 우선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과 고통은 가벼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자신의 고난과 고통을 가볍다고 느끼지 못하는 데 말입니다. 게다가 바울이 고생이나 고난을 모르는 사람이 아닐텐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이 가볍다고 하니 의아합니다. 바울의 말을 계속 들어보면 더욱 놀랍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포함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고난이 장차 영원한 영광을 이룬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고난과 고통을 가벼운 것이라고 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현재의 고난의 짐을 가볍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만일 바울이 하나님의 영광을 거론하며 맹목적으로 신앙하라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한다면, 그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아픔과 고통을 간단히 합리화해 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신앙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이나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영광을 단순하고 간단하게 내세우며 고난을 겪는 사람들에게 진통 주사를 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은 낙심할 성질의 것이 아니며, 그 무게도 가볍고, 현재의 고난이 나중에는 영원한 영광이 된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을까요? 

상속의 원리, 하나님:예수 = 예수:그리스도인

바울이 그리스도인에게 신앙 안에서 당하는 고난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는 대목은 로마서 8장 16-17절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며,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하나님의 상속자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맏아들이시니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상속자라는 것이 바울의 논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상속자이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상속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상속받은 것,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상속받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바울은 그것을 고난과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상속받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예수님이 상속하신 것을 살펴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로부터 영광만 상속받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영광과 고난을 동시에 상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예수님과 똑같은 것을 상속받는다는 것이 바로 바울의 논리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상속자가 아니라면, 고난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광도 없습니다. 

고난 상속

그러므로 바울이 보기에는, 고린도교회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과 환난은 단순한 고통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받는 고난이며 환난과 고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이 상속받은 고난은 특별한 고난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성경에서 맏아들 예수님이 상속받은 것을 낱낱이 보았습니다. 맏이인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상속했다면, 둘째와 셋째, 그리고 몇 번째인지는 모르지만 오늘을 사는 어느 그리스도인은 맏이처럼 상속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도 고난을 당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상속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나름 기도를 해도 고난의 상황이 전혀 개선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당연합니다. 예수님도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땀방울에 피가 배도록 용을 쓰며 기도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가끔 맏이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셨다면, 막내 그리스도인은 그 덕을 좀 봐야 하지 않느냐며 하나님께 떼를 쓰기도 합니다.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과 함께 상속자가 되었다면 고난의 상속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도 상속받아야 하고, 십자가 앞에서 애끓는 마음으로 기도했으나 묵묵부답인 경우도 상속받아야 하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는 데까지 내몰리는 것도 상속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영광 상속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상속받은 고난에는 영광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영원한 영광도 상속받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너희가 당하는 고난은 부활에 비하면 가볍다’고 합니다. 고난의 시간과 부활의 영원한 시간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바울의 속뜻을 알았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와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왜 낙심하지 말라며 격려한 이유는 분명해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한 형제요 자매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고난도 상속받지만 영광도 상속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을 생각하면, 지금의 고난은 가볍고 짧은 것이어서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바울은 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보이는 것은 눈으로 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뜻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아서 고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보이는 것은 이미 보고 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다만 그리스도인의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이지 이미 그가 지니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고난과 환난이라고 한다면, 그 속에 보이지는 않는 부활을 갖고 있다는 것이 바울의 설명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주목해야 할 것은 고난 속에 있는 부활입니다. 이것은 십자가 속에 숨어 있는 부활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눈에 보이는 것 속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본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믿음의 선진들입니다. 왜 그들이 믿음의 선진일까요? 보이지 않는 것 속에 숨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본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도마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도마야, 네가 봐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복되다.’ 이 말씀은 안 보고 믿는 게 복 되다는 의미이기 보다는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보이는 것 속에 담긴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보라는 예수님의 당부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소망

본문이 “그러므로”라고 시작하므로 본문의 앞부분으로 눈을 돌리면 4장 7절을 만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보배가 무엇일까요? 좀 더 거슬러 올라가 4장 1절에 이르면, 또 다시 “그러므로”라고 적혀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3장에 이르면, 거기서 바울은 영광된 직분을 말씀합니다. 결국 바울이 핵심으로 삼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에게 생긴 소망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영광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러한 보배로운 영광을 질그릇인 그리스도인이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생기라고 해서 생긴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인이 믿어서 생긴 영광도 아닌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소망, 곧 하나님의 큰 능력을 그리스도인은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목소리를 높여 고린도후서 4장 8-12절을 외칩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할 것이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사망이 그리스도인의 몸에 역사하면 눈에 잘 보입니다. 사망은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으로 다가오기 일쑤입니다. 사망이 그리스도인에게 달려드는 이유는 그가 예수의 생명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망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을 지닌 그리스도인에게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면, 마침내 사망이 이긴 것처럼 보이는 상황, 곧 십자가의 상황에까지 내몰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내몰려도 결국은 부활의 생명이 이깁니다. 부활의 생명이 사망을 이깁니다. 때때로 사망의 파도가 그리스도인을 덮치면, 그리스도인은 사망의 깊은 물속에 빠져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소망의 생명이 깊은 물속보다 더 깊고, 더 강력합니다. 물론 부활의 생명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가녀린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상속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호를 받습니다. 토기장이가 깨버려도 왜 깨느냐고 이유를 물어볼 수조차 없는 그런 질그릇인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사실, 그리스도인의 속에 보이지 않는 부활의 생명이 잉태되었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