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사(Sacramentum, 성례)

성사(Sacramentum, 성례)에 대하여




성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고, 현재화하며, 신자들에게 은혜를 전달하는 거룩한 표징이자 도구이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 특히 성육신하신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 효력을 발휘하는, 교회 공동체의 핵심적인 신앙 행위이다.

1. 성사의 근원과 본질: 은혜의 통로와 성서적 기초

성사는 단순한 인간의 행위나 상징적인 의례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사도적 전승을 통해 교회에 계승되어 온 거룩한 행위이다. 성사가 거룩한 행위인 이유는 그 기원이 하나님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성사는 인간이 고안한 의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시고 명령하신 신성한 제도로서, 그 안에 하나님의 현존과 역사하심이 담겨 있다.

성서는 성사의 근본적 기초를 제공하며, 특히 세례에 대한 예수님의 명령(마 28:19-20: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과 성찬에 대한 예수님의 제정(고전 11:23-26: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은 성사의 직접적인 성서적 근거가 된다.

구약 시대의 예표론적 표징들을 완성하는 성사는, 신약 시대의 교회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현재적으로 드러낸다. 즉, 성사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기념하는 차원을 넘어,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는 살아있는 통로가 된다. 루터교와 개혁교회 전통은 성사를 "보이는 말씀"(verbum visibile)으로 이해함으로써, 말씀의 가시적 구현으로서의 성사의 본질을 강조한다. 이는 성사가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혜 행위, 즉 인간의 공로나 노력에 의존하지 않는 전적인 은혜의 사건임을 분명히 한다.

2. 성사의 구성 요소와 다양성: 말씀과 물질의 조화

성사는 본질적으로 말씀과 물, 빵, 포도주와 같은 물질적 요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결합은 성사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핵심적 요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물질적 요소와 결합될 때, 평범한 물질이 초자연적 은혜의 매개체로 변화된다. 이는 성육신의 신비를 반영하는 것으로,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체를 취하신 것처럼, 성사에서도 영적 실재가 물질적 형태를 통해 표현된다.

여기서 말씀은 단순한 선포나 설명을 넘어,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 의미를 드러내고, 생명을 부여하는 창조적 힘을 지닌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전적 정의에 따르면, 성사는 "보이지 않는 은혜의 보이는 형태"(visible form of invisible grace)로서, 영적 실재가 물질적 매개를 통해 전달되는 신비로운 사건이다. 이러한 말씀과 요소의 유기적인 결합은 성사의 객관적 실재성을 보장한다. 즉, 성사의 효력은 집례자나 수혜자의 개인적 자질, 심리적 상태, 또는 주관적 경험에 좌우되지 않는다.

다양한 교회 전통에서 성사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고 실천된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세례, 견진, 성체, 고해, 병자, 성품, 혼인의 일곱 성사를 인정하는 반면, 개신교는 세례와 성찬(성만찬)이라는 두 가지 성사를 핵심적인 성사로 받아들인다. 동방 정교회는 일곱 성사를 인정하지만, 성사에 대한 이해에 있어 더 신비적이고 조금 덜 법적인 접근을 취한다. 성공회는 "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두 가지 주요 성사(세례와 성찬)와 "교회가 발전시킨" 다섯 가지 소성사(성품, 화해, 결혼, 병자안수, 견진)를 구분하는 중도적 입장을 취한다.

개혁교회 전통에서는 세례와 성찬을 "주요 성사"(sacramenta maiora)로, 나머지 다섯 가지는 "부차적 성사" 또는 "성사적 예식"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러한 성사의 다양성은 결코 그 본질적인 통일성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 삶의 다양한 국면과 상황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3. 성사의 효과와 목적: 변화시키는 은혜와 신비

성사의 주된 효과는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성사는 단순히 과거의 은혜를 상기시키는 차원을 넘어,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생하게 체험하게 하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며, 미래에 완성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한다.

성사가 거룩한 행위인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의례적 행위가 아니라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이기 때문이다. 성사를 통해 죄인은 의롭게 되고, 단절된 관계는 회복되며, 영적으로 죽은 자는 생명을 얻는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성사는 이 은혜가 실제적이고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거룩한 통로이다.

성사는 근본적으로 신비적 차원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이성과 언어로 완전히 해명할 수 없는 초월적 실재로서, 유한한 인간 지성의 한계를 넘어선다. 특히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 방식에 관한 다양한 견해(실체변화설, 공재설, 상징설 등)는 성사가 지닌 역설적 측면과 신비의 깊이를 보여준다. 칼뱅이 지적했듯이,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경험할 수 있는" 신비로서, 지성의 한계와 신앙의 체험 사이의 창조적 긴장을 드러낸다. 이러한 신비는 우리 지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따라서 성사는 개인의 영적 성장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일치와 성숙을 이루고, 더 나아가 세상의 변화와 갱신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 있는 도구로 기능한다. 현대 신학은 성사를 단순한 의례적 행위가 아닌, 상징적이고 관계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며, 이를 통해 인간 실존의 변화, 사회적 책임의 증진, 그리고 창조 세계와의 화해를 추구한다.

4. 성사와 신자의 실존적 경험: 신앙 여정의 이정표

성사는 신자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 결정적인 이정표로 기능한다. 세례를 통해 신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는 근본적인 실존 변화를 경험하며(롬 6:3-4),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함으로써 지속적인 영적 양식을 공급받는다(요 6:53-56). 이러한 성사적 경험은 추상적인 교리의 차원을 넘어, 전인격적인 체험으로서 신자의 정체성과 삶의 방향을 형성한다.

성사의 거룩함은 그것이 단순한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실제적인 만남의 장이라는 점에서 드러난다. 성사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고, 인간은 그분의 임재를 경험한다. 이 만남은 단순한 정보의 전달이나 지적 이해가 아닌, 존재적 변화와 영적 갱신을 가져오는 거룩한 사건이다. 성사를 통해 신자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직접 참여하게 되며, 이 참여를 통해 자신의 삶이 거룩하게 변화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특히 신자의 삶의 주요 전환점(출생, 성인됨, 결혼, 직업적 소명, 질병, 죽음 등)에서 성사는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를 체험하게 하는 구체적인 통로가 된다. 이를 통해 신자는 자신의 개인적 이야기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며, 일상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질 수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성사적 경험은 또한 신자의 영성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성사에 참여함으로써 신자는 단순한 지적 동의나 정서적 경험을 넘어,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관계 안에서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변화의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새 사람"(엡 4:24)으로서의 점진적 성화 과정이다.

5. 성사와 교회의 관계: 거룩한 표징의 공동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자 "보편적 구원의 성사"로서, 성사의 거행과 보존, 그리고 그 의미의 올바른 해석과 전달을 위한 책임을 지닌다. 교회는 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며, 동시에 성사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갱신해 나간다. 따라서 성사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 수행, 즉 복음 선포, 사랑의 실천, 세상의 변혁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성사의 거룩함은 교회 공동체의 거룩함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교회는 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참여하고,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된다. 성사는 교회가 단순한 인간 조직이나 사회적 기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체이자 하나님의 성전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거룩함은 교회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계속하는 도구가 되게 한다.

에큐메니컬 관점에서 성사는 분열된 교회들 간의 대화와 일치를 위한 중요한 연결점이 된다. 비록 성사에 대한 이해와 실천에 있어 교파적 차이가 존재하지만, 모든 기독교 전통은 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지속됨을 인정한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세례, 성만찬, 직제"(BEM) 문서는 성사에 관한 교회 일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에큐메니컬 성과이다.

교회는 성사를 통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증거하고, 그분의 구원 계획을 실현해 나가는 거룩한 표징의 공동체가 된다. 성사는 교회로 하여금 "이미"(already)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not yet) 완성되지 않은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구현하는 사명을 수행하게 한다.

6. 현대 신학의 성사론적 과제: 새로운 지평을 향하여

현대 신학은 성사론을 단순히 전통적인 교리 틀 안에 가두지 않고, 다음과 같은 과제들을 안고 끊임없이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문화신학적 접근: 다양한 문화적 맥락과 상황 속에서 성사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 성사가 지닌 상징적, 사회적, 윤리적 차원을 심층적으로 조명해야 한다. 특히 비서구적 문화 맥락에서 성사는 어떻게 이해되고 실천될 수 있는지에 대한 토착화 신학의 과제가 중요하다. 성사의 거룩함은 모든 문화와 맥락에서 보편적으로 인식되면서도, 각 문화의 특수성 안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실천신학적 연계: 성사 교육, 예배 갱신, 사회 참여 등 실제 목회 현장에서 성사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될 수 있는지, 그리고 성사가 신자들의 삶과 어떤 연관성을 맺는지에 대한 실천적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특히 디지털 시대와 팬데믹 상황에서의 온라인 성사 거행 가능성과 그 신학적 의미에 대한 질문은 새로운 도전이 된다. 성사의 거룩함이 현대 사회의 다양한 상황과 도전 속에서 어떻게 유지되고 표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기호학과 해석학적 접근: 성사를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경험과 연결시키고, 성사가 지닌 언어적, 비언어적 소통의 측면, 즉 상징과 몸짓의 의미를 더욱 깊이 탐구해야 한다. 현대 기호학과 해석학은 성사가 지닌 다층적 의미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성사의 거룩함은 단순히 교리적 선언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깊은 차원에서 경험되고 이해되는 실존적 진리이다.

생태신학적 확장: 생태 위기 시대에 성사론은 창조 세계 전체와의 연결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다. 성사에 사용되는 물, 빵, 포도주와 같은 자연적 요소들은 인간과 자연의 깊은 연관성, 그리고 창조 세계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관점은 성사를 통해 생태적 책임과 창조 세계와의 화해를 강조한다. 성사의 거룩함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결론: 신비와 은혜의 현존

성사는 단순한 의례나 상징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현재적으로 전달되며,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는 거룩한 행위이다. 성사가 거룩한 행위인 이유는 그 기원이 하나님 자신에게 있고, 그 효력이 성령의 역사에 의존하며, 그 목적이 인간의 구원과 변화에 있기 때문이다.

성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 특히 성육신하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그리고 성령의 능력 있는 역사에 근거한다. 성육신의 신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취하신 사건이라면, 성사는 이 신비의 연장선상에서 영적 실재가 물질적 형태를 통해 계속해서 전달되는 거룩한 과정이다.

성사는 인간의 완전한 이해를 초월하는 신비로운 차원을 갖고 있으며, 이는 유한한 인간 이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하나님의 초월적 은혜와 사랑에 우리를 개방시킨다. 성사는 말씀과 물질적 요소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 그 의미와 효과를 나타내며,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 수행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성사는 신자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 결정적인 이정표가 되며, 공동체적 차원에서는 교회의 일치와 세상을 향한 선교적 증언의 기초가 된다. 성사는 신자들의 삶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도구이기에, 우리는 성사의 올바른 이해와 거룩한 실천을 통해 더욱 풍성한 은혜의 삶을 누리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해야 할 것이다.

성사의 거룩함은 결국 하나님 자신의 거룩함을 반영하는 것이다. 성사를 통해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만나고,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하며, 점차 그분의 형상을 닮아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사가 단순한 종교적 의식이 아닌, 진정으로 거룩한 행위인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