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말고 그분이 가리키는 어린 아이를 바라보자 (막 9:30-37)

오늘 설교자는 마가복음 9:30-37을 본문으로 '어린이(약자)가 우선인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설교자는 어린이를 약자의 대표로 설정했는데, 자구책이 없는 이를 약자로 정의했다. 설교자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아름다웠던 모습을 회복하자고 촉구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고아, 과부, 병자, 가난한 이들을 보살폈고, 특히 가난한 이들의 장례식을 치루어주었다. 1-2세기 로마의 압박 아래 살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왜 그런 데 관심을 두었을까? 

예수의 3단 논법 때문이다.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나를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구책이 없는 사람들을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을 믿었다. 설교자는 한국의 천도교(동학)에도 그런 비슷한 논리가 있음을 소개했다. 천도교가 세계 최초로 '아동 인권 선언'을 했다. 그 기초가 바로 '아이는 어린 한울님'이라는 사상이다. 손병희 선생이 천도교 3대 교주였는데, 그분 사위가 소파 방정환이다. 방정환 선생이 한국의 어린이 날을 제정한 컨텍스트가 '아이는 어린 한울님'이다. 

#우리는 곧잘 예수의 말씀, '첫째가 되고 싶으면 꼴찌가 되라'를 첫째가 되기 위한 처세와 투자로 왜곡한다. 이것은 예수의 뜻이 아니다. 예수는 그런 욕망 대신 어울려 살라고 당부했다. 사람의 욕망을 꿰뚫는 예수는 심지어 당신의 삼단논법에서 어린 아이와 자신을 동일시 했다.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려 하지 말고 보이는 부모를 섬기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섬기려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함을 우리보다 예수가 더 근본적으로 안다. 예수를 따르려 들면 우리는 반드시 실패한다. 예수는 어린 아이를 가리키고 있는데, 어린 아이를 보지 않고 예수를 쳐다보면 예수의 뜻에 어긋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