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네 (갈 6장)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네
갈라디아서 6장
12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14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15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17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닙니다.
1. 헛된 자랑의 동기: 십자가의 박해를 피하려는 자들
바울은 친필로 남기는 마지막 경고에서 거짓 교사들의 위선적인 동기를 단숨에 꿰뚫는다. 그들이 할례를 강요하는 이유는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열심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고자" 하는 비겁한 자기 보신책일 뿐이다. 당시 '십자가만으로 충분하다'는 복음은 유대주의자들에게 신성모독이자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하는 위험한 사상이었다. 그들은 이 '십자가의 걸림돌'을 제거하고 싶었다. 복음에 할례라는 유대교의 전통을 섞어 유대 공동체 내에서 신변의 안전과 종교적 기득권을 유지하려 한 것이다. 그들의 자랑은 '육체의 겉모양', 즉 얼마나 많은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었는가 하는 외적인 성과였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세상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만한 '겉모양'으로 나의 신앙을 꾸미고 있지는 않은가? 십자가의 순전한 복음이 가져올 수 있는 오해와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세상의 가치와 적당히 타협하고 있지는 않은가?
2. 새로운 차원의 선언: 새롭게 창조되는 것
거짓 교사들이 '할례냐 무할례냐'는 낡은 틀 안에서 논쟁할 때, 바울은 그 판 자체를 뒤엎어 버린다. 그는 문제를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바울 신학의 정수이자 복음의 심장이다. 새 창조는 단순히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윤리적 개선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시작된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 새로운 질서 그 자체이다. 이 새로운 창조 안에서는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구분선(유대인/이방인, 남자/여자, 종/자유인)이 무력해진다. 옛 세상의 자랑거리였던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이 새 창조는 먼 미래의 이상향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된 현실이다. 우리가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는 이 새 창조의 생명력이 우리 삶을 뚫고 나오는 '첫 열매'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핵심은 비록 손에 잡히지 않더라도 내가 어떤 종교적 행위를 했는가(할례)가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새 창조)에 있다.
3. 유일한 자랑의 흔적: 예수의 스티그마
바울은 자신의 모든 논증을 가장 강력하고 개인적인 고백으로 마무리한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스티그마)을 지고 다닙니다." '스티그마'는 본래 노예나 가축에게 찍던 지울 수 없는 낙인이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얻은 수많은 흉터를 내보이며 자신이 그리스도께 영원히 소속된 '종'임을 선포한다. 이 흔적의 힘은 그것의 불가역성(irreversibility)에 있다. 세상의 자랑은 있다가도 없어지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우리 영혼에 새기신 구원의 낙인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여기에 놀라운 복음의 역설이 있다. 우리는 '예수의 스티그마'를 지닌 자답게 살려고 애쓸수록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과 죄성만을 더 깊이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바로 그 실패의 자리에서 스티그마의 진짜 능력이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의 자격이나 성취로 유지되는 흔적이 아니라, 우리의 자격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내 것이다'라고 주장하시는 그리스도의 무한한 은혜의 표식이기 때문이다. 나의 실패가 오히려 나를 다시 십자가의 은혜로 이끈다. 이것이 절망적인 반복이 아닌 은혜를 향한 나선형 상승의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