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을 완성하는 자유 (갈 5장)
율법을 완성하는 자유
갈라디아서 5장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13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14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1. 믿음의 본질: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갈라디아서의 신학적 논쟁은 6절의 선언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한 문장으로 율법주의자들이 세운 모든 경계선을 허물어 버린다. 그들이 신앙의 증표로 내세웠던 할례는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능력도 없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이 내세울 수 있는 모든 종교적 행위와 업적은 무력해진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가?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그 믿음이 필연적으로 낳는 열매인 '사랑'뿐이다. 여기서 믿음은 머리로만 동의하는 지적 신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살아있는 동력이다. 할례가 편을 가르고 차별하는 '분리의 표지'였다면, 사랑은 서로를 섬기고 하나 되게 하는 '연합의 증거'이다. 당신의 믿음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것은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율법의 조항을 쌓고 있는가, 아니면 이웃을 향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일하고 있는가?
2. 자유의 목적: 사랑의 종이 되기 위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받은 자유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선포하는 동시에, 그 자유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도 경고한다.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육체의 욕망'은 이중적이다. 첫째는 방종으로 흐르는 세속적 욕망이다. 모든 율법에서 해방되었으니 이제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치명적인 오해다. 둘째는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종교적 욕망이다. 은혜의 자유가 불안하여 눈에 보이는 행위(할례)로 자신의 구원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교묘한 육체의 일이다. 바울은 이 두 가지 위험한 길을 모두 거부하고 제3의 길, 곧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길'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이 얻은 자유는 방종을 위한 자유도, 율법을 지키기 위한 자유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사랑하기 위한 자유'이다. 우리는 죄의 종이었던 옛 상태에서 해방되어, 이제는 기쁨과 자발성으로 '사랑의 종'이 되도록 부름받았다. 이것이 자유의 진정한 목적이며, 가장 영광스러운 사용법이다.
3. 은혜의 역설: 감사의 윤리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폐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진정한 정신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여준다. 율법의 조항들을 하나하나 지키려는 노력으로는 결코 율법을 완성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압도적인 사랑(십자가)을 경험할 때, 우리는 그 은혜에 대한 '감사'로 반응하게 된다. 이 '감사의 윤리'야말로 율법의 모든 요구를 뛰어넘어 자발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만드는 새로운 동력이다. 이 사랑을 실천하려 애쓸수록 우리는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과 이기심을 더 깊이 깨닫게 된다. 놀라운 은혜의 역설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밝게 비칠수록, '죄인의 괴수'라 고백했던 바울처럼 우리는 자신의 비참함을 절감한다. 그러나 이 깨달음은 절망이 아닌 더 큰 감사로 이어진다. 나의 힘이 아닌 내 안에 계신 성령의 능력으로만 이 사랑이 가능함을 고백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의 '최종적 고백'이다. 결국 갈라디아서의 자유는 우리를 교만하게 만드는 면허증이 아니라, 우리를 더 깊은 감사의 자리, 더 낮은 섬김의 자리로 이끄는 은혜의 초대장이다. 바로 이 사실을 바울은 갈라디아 공동체에게 호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