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당겨와 걷는 피난민의 닻 (히브리서 6장)

핵심 요약: 히브리서 6장은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본 뒤에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회개하게 할 수 없다는 서늘한 경고로 문을 연다(4-6절). 그러나 이 준엄한 말씀은 공동체를 절망의 감옥에 가두려는 마지막 선고가 아니다.

히브리서 6장은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본 뒤에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회개하게 할 수 없다는 서늘한 경고로 문을 연다(4-6절). 그러나 이 준엄한 말씀은 공동체를 절망의 감옥에 가두려는 마지막 선고가 아니다. 구약 예언자들의 마지막 말이 언제나 심판이 아니라 구원과 희망이었듯, 편집자는 곧바로 구원에 속한 더 좋은 확신으로 시선을 돌린다(9절). 당시 유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마주한 삶의 자리는 제 힘으로는 한 치 앞의 희망도 볼 수 없을 만큼 캄캄한 막다른 골목이었다. 편집자는 그 숨 막히는 현실 한복판으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불러낸다. 아브라함이 오래 참아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역사(15절)는 오늘 고난 속에서 버텨내야 하는 신자들이 예수 안에서 오래 참고 그분에게로 피해 달아나야 할 이유와 맞닿아 있다.

13절부터 18절이 증언하는 풍경에는 기묘한 절박함이 흐른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어 자기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셨다(13절). 하나님 편에서는 당신의 이름을 통째로 걸고 보증하셔야만 했고, 땅의 공동체 편에서는 그 하나님의 맹세 외에 달리 붙잡을 만한 밧줄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18절이 신자들을 가리켜 앞에 놓인 희망을 붙들려고 하나님께로 피해 달아난 자들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아무런 밑천도 남지 않아 오직 하나님의 거짓말하실 수 없는 약속과 맹세 속으로 도망쳐 숨은 사람들에게 바로 그 피난처가 영원하고 견고한 희망의 자리가 된다.

편집자는 이 희망을 안전하고 확실한 영혼의 닻이라고 부른다(19절). 원래 배의 닻은 거센 풍랑에 휩쓸리지 않도록 바다 맨 밑바닥으로 무겁게 내리는 쇠붙이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닻은 땅이나 바다 밑이 아니라 하늘의 나눔막 더 안쪽으로 던져져 있다. 그곳은 멜기세덱의 경우를 따라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가 우리를 위해 앞서 달려가는 자로서 이미 들어가신 자리다(20절). 여기서 한 장의 생생한 그림이 떠오른다.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려면 마땅히 자기 앞이나 발밑을 내려다봐야 걸을 수 있다. 그러나 나눔막 안쪽에 영혼의 닻을 둔 사람은 발밑의 돌부리가 아니라 하늘을 쳐다보며 앞으로 걸어간다. 시선을 하늘의 대제사장에게 두고 한 걸음씩 내딛는 그 기이한 걸음이야말로 팍팍한 땅의 현실 한복판으로 하늘을 당겨와서 살아가는 모습이다.

하늘을 쳐다보며 앞으로 걸어가는 이 걸음은 결코 인간의 근육이나 결단에서 나오지 않는다. 성서 어느 곳도 그 힘이 인간에게서 나온다고 말하지 않으며, 만약 인간에게서 나온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더는 성서가 아닐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땅 위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발을 떼는 일은 오직 하늘의 힘, 하늘에 의한 힘, 궁극적으로는 하늘을 위한 힘이 작동할 때만 일어난다. 10절에서 공동체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성도들을 섬겼고 지금도 섬기고 있다는 기록은, 그 하늘의 힘이 땅 위에서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는지 보여준다. 내 코가 석 자인 현실에서 곁의 지체를 돌보고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 일은 세상 눈으로 볼 때 가장 약하고 어리석어 보인다. 그러나 가장 약해 보이는 바로 그 사랑과 피난민의 걸음 속에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나눔막 안쪽에서 친히 당기시는 가장 강력한 하늘의 힘이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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