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초대장과 아비의 줄서기 (히브리서 11장)
히브리서 11장은 영웅적인 신앙 위인전이라는 오랜 오해의 껍질을 벗길 때 비로소 그 서늘한 맨얼굴을 드러낸다. 1절에서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로 규정한 편집자는 세월의 시한이 없는 초대장을 펼쳐 든다. 그러나 초대장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순간 독자는 숨이 턱 막힌다. 33절에서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고 약속을 받아낸 자들을 칭송하던 문장은, 35절에 이르러 아무런 완충 장치도 없이 두 동강 난다. 한쪽에는 죽은 자식을 부활로 돌려받은 이들이 서 있고, 맞은편에는 풀려날 기회를 단호히 거절한 채 옥고와 모진 고문을 견뎌낸 이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승리와 파국이 '믿음'이라는 단 하나의 이름 아래 동등한 무게로 포개져 있다.
고난을 제 발로 찾아 나설 인간은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희미한 약속을 붙들고 뼈를 깎는 고초를 자처하는 일은 상식의 테두리 바깥에 있다. 예수도 붙잡고 고난도 피하고 싶은 태도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셈법이다. 그런데 편집자는 도망칠 문이 열려 있었음에도 풀려나기를 거부했던 이들을 믿음의 한복판에 배치한다. 게다가 39절에 이르러서는 그토록 억척스럽게 버텨낸 선조들조차 결국 눈에 보이는 약속의 열매를 받아 쥐지 못했다고 냉정하게 선언한다. 피와 살을 바쳐 견뎠으나 손안에 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이 보고는 잔인함을 넘어 가슴 한구석을 서먹하게 만든다. 편집자는 바로 그 결핍과 고난의 길을 가리키며 독자들을 향해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초대장을 받아 든 독자가 문턱에서 선뜻 발을 들이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돌아서지도 못한 채 멈춰 서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보이지 않는 더 나은 본향을 소망하며 지상의 안락을 버리는 삶은 연약한 육신에게 불가능의 영역처럼 다가온다. 그 거대한 선조들의 궤적 앞에서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고백은 영웅적인 결단이 아니다. 복음서 속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절박하게 토해냈던 울부짖음, 곧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는 탄식이다(막 9:24). 이 부르짖음은 고난을 피하고 싶어 주저하는 비겁함을 숨기지 않고 정직하게 드러내는 실존의 고백이다. 편집자가 보낸 초대장은 인간의 얄팍한 배짱을 요구하지 않는다. 문턱에서 떨고 있는 바로 그 아비의 솔직한 무력감을 가감 없이 드러낼 뿐이다.
편집자는 39절의 잔인한 선언으로 편지를 닫지 않는다. 40절에서 구약과 신약의 간극을 가로지르고 오늘의 독자마저 단숨에 끌어안는 뜻밖의 시선을 제시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기에, 우리 없이는 옛사람들도 온전해질 수 없도록 정하셨다는 선언이다. 선조들의 치열한 믿음은 그 자체로 완결된 닫힌 서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늘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 버거워하며 비틀거리는 우리의 자리를 비워둔 채 기다리는 미완성의 줄이었다. 믿음의 줄에 선다는 것은 초인적인 신념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다. 고난을 피하고 싶은 비겁함과 정직한 결핍을 안은 채, 앞선 이들이 남겨둔 빈자리에 마침내 부끄러운 제 발을 얹어놓는 일이다. 그 헐벗은 자리가 채워질 때 선조들의 오랜 기다림도 비로소 온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