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좌에 던진 공과 뼈에 새긴 오늘 (히브리서 1장)
히브리서 1장은 비명이나 탄식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유대 사회의 혈통과 성전 제의라는 견고한 성벽 밖으로 밀려나 박해와 상실의 벼랑 끝에 선 신자들 앞에서 저자는 신약성서에서 가장 엄격하고 서늘한 문장으로 아들의 초상을 세워 올린다. 옛 선지자들의 이름을 단 하나도 거명하지 않고, '예수'라는 지상의 이름조차 1장 끝까지 아껴둔 채, 만물을 말씀으로 지탱하고 죄를 정결하게 하신 아들의 승귀(Exaltation)를 곧장 선언한다(히 1:3). 삶의 터전이 허물어지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이들에게 던져진 첫마디는 값싼 위로나 감정적 하소연이 아니라, 천사보다 높고 위대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신 아들의 초연한 위엄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빼앗긴 회중에게 저자는 다시 예수의 이름을 내민다. 예수로 말미암아 초래된 고난의 사태를 오직 예수의 존재로써 돌파하려는 이 시도는 얼핏 이열치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체념이나 독기 어린 오기가 아니다. 저자의 붓끝에는 소리쳐 울부짖거나 광분하지 않는 차분한 결기가 서려 있다. 예수 때문에 발생한 상황이라면 그 사태의 책임을 져야 할 분도 오직 예수뿐이라는 서늘한 역설이다. 고난의 현장에 남겨진 신자들은 보좌를 향해 가장 날카로운 탄원의 공을 던진다. 이 화려한 찬가는 사실 저 높은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린 가장 대담한 고발장이다.
하지만 고발장을 받아 든 아들은 하늘 높은 곳에 이미 앉아 계신다. 하나님은 아들에게 원수들이 그의 발등상이 될 때까지 거기 앉아 있으라고 명하신다(히 1:13, 시 110:1). 승리자는 이미 보좌에 좌정하여 평온을 누리는데, 땅 위의 신자들은 여전히 짓밟히고 피를 흘리는 모순이 남는다. 원수들이 굴복하기까지의 유예된 시간 속에서 신자들은 욥을 닮은 자리로 내몰린다. 자신의 살이 썩고 뼈만 남더라도 뼈에 질문을 새겨두고 끝내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던 욥의 고투처럼 신자들은 침묵하는 하늘 아래서 부조리한 시공간을 온몸으로 살아낸다. 승리의 약속은 주어졌으나 눈앞의 손쉬운 승리는 어디에도 없는 그 틈새에서 믿음은 비로소 날카로운 뼈를 드러낸다.
저자가 인용한 시편의 외침은 어제의 흘러간 제의가 아니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히 1:5, 시 2:7)라는 단호한 현재형이다. 아들의 즉위식이 과거의 지나간 사태에 불과하다면, 오늘 박해를 견디는 신자들에게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그것은 반드시 지금 숨 쉬는 오늘(σήμερον)의 사건이어야 한다. 신자들은 폭풍우 치는 현실 속에서 요동치지 않고 제단을 지키는 사제처럼 정중동(靜中動)의 태세로 무릎을 꿇는다. 소란한 비명 대신 가장 단정한 언어로 아들의 보좌를 증언하는 이 침묵의 기도는 하나님 스스로가 당신의 약속에 묶이도록 몰아넣는 결단의 행위다.
아들은 여전히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고, 원수들은 아직 발등상이 되지 않았다. 신자들에게는,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는 여전히 뼈에 새겨진 질문과 풀리지 않은 고난의 무게가 남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아들의 초상을 끝까지 응시한다. 공은 이미 던져졌고, 대답의 몫은 저 높은 보좌에 넘겨졌다. 그들은 승리를 장담하는 오만함 대신 '오늘'이라는 부조리한 시간을 묵묵히 버텨내는 차분한 결기로 아들의 침묵과 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