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무서운 형벌, 하나님과의 단절 (아모스 8장)

가장 무서운 형벌, 하나님과의 단절

아모스 8장 묵상

2 주님께서 물으신다.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였다. "여름 과일 한 광주리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다. "나의 백성 이스라엘이 끝장났다. 내가 이스라엘을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 7 주님께서 야곱의 자랑을 걸고 맹세하신다. "그들이 한 일 그 어느 것도 내가 두고두고 잊지 않겠다." 11 그 날이 온다. 나 주 하나님이 하는 말이다.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겠다. 사람들이 배고파 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 14 사마리아의 부끄러운 우상을 의지하고 맹세하는 자들, '단아, 너의 신이 살아 있다', '브엘세바야, 너의 신이 살아 있다' 하고 맹세하는 자들은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1. "여름 과일"과 "끝장"의 언어유희

2절을 읽으며 잠시 숨을 고릅니다. "여름 과일(케츠)" 한 광주리를 보았을 뿐인데, "나의 백성이 끝장났다(카이츠)"는 선언이 이어집니다. 히브리어의 비슷한 발음을 이용한 이 언어유희 앞에서,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예언인가, 아니면 시대를 한탄하는 이의 일갈인가 하는 질문과 마주합니다. 나라의 존망이 걸린 선포에 라임을 맞추는 기교가 웬 말입니까.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이 질문은 예언서 전체의 권위를 흔듭니다. 예언서는 하나님의 계시입니까, 아니면 의로운 현자의 외로운 외침입니까? 그러나 이 기교는 단순한 말장난이라기보다는 피할 수 없는 심판의 '임박성'과 '확실성'을 각인시키는 서늘한 문학적 장치일 것입니다. 잘 익은 여름 과일이 곧 추수되어 사라질 운명이듯이 이스라엘의 죄악이 무르익어 이제는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하기 위해 "주님께서 말씀하신다(코 아마르 야훼)"고 덧붙인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아니고서는 이 절망적 현실을 설명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2. 가장 무서운 형벌

7절과 14절은 심판의 이유를 명확히 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향한 불의를 "결코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헛된 우상을 섬기는 배교 행위는 결국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파멸을 낳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가시적 심판보다 더 근원적이고 무서운 형벌이 11절에 선포됩니다. 그것은 밥이 없어 겪는 배고픔이나 물이 없어 겪는 목마름이 아닙니다. 바로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서" 겪는 영적 기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인간에게 내릴 수 있는 최대, 최고의 형벌인 '관계의 단절'이며, 인간 편에서는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는 가장 끔찍한 비극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예언자의 통찰이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영적 기갈이야말로 모든 파멸의 원인이자 결과라는 깨달음은, 이 예언이 인간의 사유를 넘어선 신적 계시임을 증언합니다.

3. 2700년의 평행선과 빈 공간

아모스가 활동했던 주전 8세기와 2025년 현재, 과연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무섭도록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사람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 둘은 만날 일 없이 정확히 평행선을 약 2700년간 내달렸습니다. 이쯤이면 만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는 자신과 하나님의 연결된 관계 속으로 모든 인간을 품어달라고 청원합니다. 이것이 성서의 핵심이자 중심입니다. 단절된 평행선을 잇기 위한 하나님의 자기 제안입니다. 이 제안 앞에서 우리는 다시 묻습니다. 기독교는 포이어바흐의 분석처럼 인간 사유의 투사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계시입니까? 우리의 논리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유했던 '부동의 원동자', 창세기 저자가 고백했던 '창조주', 현대 우주론이 탐구하는 '빅뱅'은 모두 존재의 시작을 설명하려 하지만, 그 이전의 '빈 공간' 앞에서 침묵합니다. 바로 우리의 이성과 경험이 가닿지 못하는 그 빈 공간을 신앙의 영역이 채웁니다.

4. 응답으로서의 묵상

그렇다면 나의 이 묵상 행위는 무엇일까요? 이 또한 하나님을 향한 나의 갈망이 만들어낸 '자가발전 엔진'과 같은 것은 아닙니까? 내가 말씀을 찾고 있으니 하나님은 계시다는 순환논리의 함정은 아닐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내가 영적 기근을 느끼고,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며, 이 오래된 예언서 앞에서 고뇌하는 것 자체가 내가 시작한 일이 아님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 갈증은 내 안에서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분께서 내 안에 심어두신 근원적인 흔적입니다. 나의 묵상은 자가발전이 아니라, 이미 나를 향해 움직이고 계시는 '부동의 원동자'께 드리는 미약하지만 진실한 응답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행위 자체가 빛이 존재한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성서를 묵상하는 나에게 건너오심, 이것은 변하지 않는 나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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