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5장: 값싼 섭리와 거룩한 '어찌하여'
출애굽기 5장: 값싼 섭리와 거룩한 '어찌하여'
"파라오가 대답하였다. '주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주를 알지도 못하고, 이스라엘을 보내지도 않겠다.' ... 너희가 이스라엘 자손을 굽어살피시는 주님께 엎드려 빌기를 '칼이나 전염병으로 우리를 치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고 빈다지만, 너희에게 내릴 벌은 바로 이것이다. ... 모세는 주님께 돌아와서 호소하였다.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이 백성에게 이렇게 괴로움을 겪게 하십니까? 정말, 왜 저를 이 곳에 보내셨습니까? ...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주님의 백성을 구하실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계십니다.'" (출애굽기 5:2, 3, 22-23 부분 발췌, 새번역)
야심 차게 바로 앞에 섰던 모세는 처참한 패배를 맛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면 바로가 두려워 떨 줄 알았으나, 돌아온 것은 "야훼가 누구냐?"라는 조소뿐이었습니다.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습니다. 짚도 주지 않고 벽돌 수는 그대로 채우라는 가혹한 명령이 떨어졌고, 동족들은 모세를 향해 저주를 퍼붓습니다. 혹을 떼려다 하나 더 붙인 격입니다. 모세는 지금 당혹감과 배신감, 그리고 무력감이라는 삼중고 속에 갇혀 있습니다.
이 난감한 5장의 현실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 해석의 갈림길에 섭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는 만능키를 사용하여 이 모든 상황을 즉각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이 고난도 다 하나님의 큰 그림이야." "바로의 완악함도 예정된 섭리야." 틀린 말은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정답입니다. 그러나 이 정답을 너무 일찍 꺼내 드는 것은 위험합니다. 고통의 현장에서 치열한 고민 없이 내뱉는 '섭리'는 진통제가 아니라, 영혼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값싼 섭리(Cheap Providence)'가 되기 때문입니다.
값싼 섭리는 오늘날 신앙인들의 가장 무서운 질병입니다. 그것은 몸속에 숨어 있는 암과 같아서 우리가 현실의 모순과 아픔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만약 모세가 22절의 탄식 대신 "주님, 이 핍박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라고 점잖게 고백했다면 어땠을까요?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거룩한 게으름'입니다. 하나님과 씨름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고, 종교적 언어 뒤에 숨어버리는 비겁함입니다. 그러한 신앙은 비바람이 몰아치면 금세 무너질 모래 위의 집과 같습니다.
모세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길을 택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자신의 눈높이로 끌어당겨 멱살을 잡듯 묻습니다. "어찌하여 이 백성을 괴롭히십니까?", "왜 저를 보내셨습니까?", "왜 구하실 생각을 안 하십니까?" 이것은 불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거룩한 탄원(Lament)'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각본에 맞춰 앵무새처럼 순종하는 자가 아니라, 부당한 현실 앞에서 "왜?"라고 비명을 지르며 당신의 옷자락을 붙드는 자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섭리는 인생의 앞길을 비추는 전조등이 아니라, 지나온 길을 되돌아볼 때 비로소 켜지는 '후미등'입니다. 섭리라는 말은 인생에서 가장 희귀하게 사용되어야 하며, 치열한 질문과 고뇌의 터널을 통과한 후에야 터져 나와야 할 최종적 고백이어야 합니다. 모세처럼 섭리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정직한 절규입니다.
하나님은 침묵 속에 계신 부동의 원동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날선 질문, '불편한 기도'에 "이제 내가 할 일을 네가 보리라"(6:1)고 응답하셨습니다. 섣부른 섭리론으로 고통을 봉합하려 하지 맙시다. 대신 모세처럼 치열하게 묻고, 따지고, 아파합시다. 그 정직한 씨름의 끝에서만, 우리는 비로소 속 빈 강정이 아닌 꽉 찬 알곡 같은 하나님의 구원을 맛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