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5장 묵상: 의인의 간구, 부러진 갈대, 그리고 숨 가쁜 현재
야고보서 5장 묵상: 의인의 간구, 부러진 갈대, 그리고 숨 가쁜 현재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큰 효력을 냅니다." (16절, 새번역)
야고보서 5장은 두 개의 다른 세상을 향한 극명히 다른 선포로 시작됩니다. 불의한 부자들을 향해서는 회개의 기회를 주는 목회적 권면 대신 돌이킬 수 없는 죄악에 대한 구약 예언자적 심판 선고가 내려집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울고 통곡하라”(1절)는 외침 속에는 그들이 기도하며 돌이킬 것이라는 기대조차 없습니다. 재물에 마음이 썩어버린 그들에게 남은 것은 임박한 심판뿐입니다. 반면, 그들에게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약자들을 향해서는 인내라는 무거운 짐이 지워집니다. “여러분도 참으십시오.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8절) 왜 고통의 원인 제공자가 아닌 피해자에게만 견뎌내라는 요구가 주어지는 걸까요?
신학은 이 인내를 수동적 체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를 믿고 버텨내는 ‘저항적 인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체념이든 저항이든 인내라는 상황은 변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가 가깝다는 약속은 이미 2000년의 시간을 흘려보냈고, 그 간극을 메우려는 수많은 신학적 설명들은 고통받는 현실 앞에서 공허한 자위책처럼 들릴 때가 많습니다. 당장 개혁의 불을 붙여야 했던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 부른 이유도 어쩌면 이 ‘참으라’는 말이 가진 현실적 무력감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에 힘이 실리는 이유입니다.
야고보는 이 기약 없는 인내의 시간을 버텨낼 무기로 기도를 제시합니다. 엘리야의 예를 들며 “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큰 효력을 냅니다”(16절)라고 독려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솔직한 경험은 이 약속 앞에서 머뭇거립니다. 수많은 독자들은 기도해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현실, 자신의 처지 하나 구원하지 못하는 기도의 무력함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기도는 약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라지만, 그 저항의 메아리가 들려오지 않을 때 우리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 구원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의 기도는 어디를 향해야 합니까?
결국 이 모든 질문은 100년짜리 유한한 인생이 영원을 논하려는 근원적인 허무함과 마주하게 합니다. 영원의 시간 앞에서 수천 년간 지속된 신학적 모순을 제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저 이 땅에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면서 부자와 가난한 자로 나뉘어 아웅다웅 살아가는 인간의 처참함 속에서 다만 현존재의 숨만 가쁠 뿐입니다.
어쩌면 야고보가 말한 큰 효력을 내는 의인의 간구는 상황을 극적으로 반전시키는 기적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모든 신학적 설명이 무너지고, 인내의 끝에서 희망마저 희미해진 그 자리,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그 허무함의 심연 속에서도 끝내 하나님을 향한 마지막 끈을 놓지 않는 영혼의 가장 정직한 신음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해결되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드리는 기도. 부러진 갈대와 같은 존재가 터뜨리는 그 마지막 숨결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외면하지 않으시는 가장 강력한 기도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