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4장 묵상: 하나님께 가는 역설의 길, 낮아짐, 애통, 그리고 번개처럼 임하는 은혜

야고보서 4장 묵상: 하나님께 가는 역설의 길, 낮아짐, 애통, 그리고 번개처럼 임하는 은혜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 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 (8절, 새번역)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 더 많이 웃고 즐기라고 속삭입니다. 성공과 기쁨이라는 '화관'을 쓰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 가르칩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정반대 방향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세상의 상식을 뒤엎는 충격적인 명령을 내립니다. "여러분은 괴로워하십시오. 슬퍼하십시오.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십시오.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9절)

이것은 자기 연민이나 우울에 빠지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두 마음'을 버리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직시하며 터뜨리는 거룩한 애통, 즉 회개로의 부르심입니다.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웃음을 포기하고 죄에 대한 슬픔을 택할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행위의 본질은 바로 이 애통하는 회개에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10절)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겸손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낮추는 미덕으로 이해하지만,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애초에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은 성품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실존적 위치에 대한 가장 정직한 고백입니다. 나의 유한함, 나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함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비교 가능한 겸손은 없고 오직 회개만 있을 뿐입니다. 회개가 겸손입니다.

정직하게 자신의 삶과 존재를 성찰할 때, 우리는 루터의 고백처럼 자신이 죄인(peccator)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히 스스로 의롭다(iustus)고 말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바로 이 완전한 절망과 자기 파산의 지점에서 야고보의 약속이 빛을 발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이 '높여주심'은 우리의 낮아짐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상태와 무관하게 마치 번개처럼 내리꽂히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우리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언, 즉 칭의(justification)입니다.

십자가 위의 강도는 묻지 않았다

우리는 종종 구원의 방식을 두고 논쟁합니다. 은혜가 우리 안에 주입(infusion)되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인지, 아니면 죄인인 상태 그대로의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imputation)되어 의롭다 '여겨주시는' 것인지를 두고 날카롭게 대립합니다. 이 신학적 구분은 구원의 확신을 위해 중요하지만, 자칫 우리를 또 다른 죄인의 논리 대결로 이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 위의 한 강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구원의 신학적 정당성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그럴 시간도 자격도 없었습니다. 오직 죽어가는 죄인의 절박함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는 그저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눅 23:42)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의 외침은 정교한 신학 고백이 아니라 "어떤 방식이든 살고 봐야겠다"는 영혼의 절규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응답은 조건이나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 즉각적이고 완전한 구원의 선포였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논리와 자격을 증명하려 애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저 죄인 된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엎드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부르짖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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