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장: 타지 않는 불꽃 속으로, 무한이 유한을 품다
출애굽기 3장: 타지 않는 불꽃 속으로, 무한이 유한을 품다
"모세가 그것을 보려고 오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 (출애굽기 3:4, 11, 14 부분 발췌, 새번역)
침묵의 강물 위를 떠돌던 질문이 마침내 답을 얻는 순간입니다. 미디안 광야의 황량함 속에서, 타오르되 소멸하지 않는 기이한 떨기나무가 모세의 시선을 붙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을 거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이 부르심은 태초의 에덴동산을 떠올리게 합니다. 죄를 짓고 두려워 나무 뒤로 숨었던 아담을 향해 "네가 어디 있느냐" 찾으시던 그 음성입니다. 아담은 숨었지만, 모세는 타지 않는 불꽃을 향해 발걸음을 옮깁니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거룩한 호기심으로 나아가는 이 장면은, 단절되었던 신과 인간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만남은 모세에게 당혹스럽습니다. 40년 전, 왕자의 권력을 쥐고 자신의 힘으로 민족을 구원하려 했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오히려 그 실패로 인해 모든 희망을 내던지고 스스로를 미디안의 양치기로 규정하며 체념 속에 살아가던 지금, 하나님은 불쑥 찾아와 "가라"고 하십니다. 묻어두었던 생채기가 다시 들춰집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그 일을 합니까?"(11절). 이것은 겸손을 넘어선 항변입니다. 자신의 능력이 충만했을 때는 가만히 계시다가, 이제 와서 무능한 노인이 된 자신에게 왜 이러시느냐는 뼈아픈 외침입니다. 인간의 끝자락이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시작이 열린다는 십자가의 역'이 여기에 있습니다.
모세는 그 두려운 존재에게 이름을 묻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대상을 규정하고, 나아가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준 것은 본래 사랑과 헌신의 관리(청지기)를 위함이었으나, 타락한 인간은 이름을 소유와 지배의 수단으로 변질시켰습니다. 모세 역시 자신의 인식 체계 안에서 이 신을 파악하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붙여주는 명사(名詞)가 되기를 거부하십니다. 대신 하나님은 "나는 곧 나다(I AM WHO I AM)"라는 동사(動詞)로 답하십니다.
"존재 그 자체."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인간의 언어라는 좁은 그릇에 억지로 밀어 넣으신 사건입니다. 피조물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기에 이름을 가지지만, 창조주는 스스로 존재하기에 이름이 없습니다. 그분은 모세 이전에도 계셨고, 지금 모세의 고통 곁에도 계시며, 앞으로도 영원히 활동하실 분입니다. 이 압도적인 존재의 선언 앞에서 모세의 시간은 멈춥니다. 아니, 모세의 찰나(유한)가 하나님의 영원(무한) 안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떨기나무는 불에 타고 있었으나 타서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모순이자 신비입니다. 맹렬한 불꽃인 무한한 하나님이 마른 나무와 같은 유한한 피조물인 모세를 찾아오셨으나 그를 파괴하지 않고 품으시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나 통제 너머에 계십니다. 우리가 이름을 붙여 부릴 수 있는 신은 참된 신이 아닙니다. 모세는 이제 자신의 이름도, 과거의 상처도, 미래의 두려움도 모두 "스스로 있는 자"라는 거대한 존재의 바다에 던져 넣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2장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침묵을 견뎌야 했다면, 3장에서는 우리를 압도하며 찾아오시는 그분의 현존 아에 섭니다. 코람 데오(Coram Deo)입니다. 무한이 유한을 품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자신의 낡은 지팡이를 잡지만, 사실은 그 존재에게 붙잡힌 바 되어 이집트로 향할 것입니다. 떨기나무의 불꽃은 꺼지지 않을 것이며, 그 불꽃은 이제 모세의 심장 속으로 옮겨붙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