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장: 침묵의 강물 위에 띄운 질문, 그리고 숨어 계시는 은총
출애굽기 2장: 침묵의 강물 위에 띄운 질문, 그리고 숨어 계시는 은총
"그러나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서, 갈대 상자를 구하여다가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아이를 거기에 담아 강가의 갈대 사이에 놓아 두었다... 마침 바로의 딸이 목욕을 하려고 강으로 내려왔다... 세월이 지나, 모세가 어른이 되었다... 모세는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 쳐서, 거기에서 머물렀다." (출애굽기 2:3, 5, 11, 15 부분 발췌, 새번역)
출애굽기 2장은 한 인간의 40년이라는 긴 시간을 숨 가쁘게 압축합니다. 히브리인으로 태어났으나 이집트의 왕자로 자라고, 살인자가 되어 미디안의 도망자가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몇 줄의 문장 속에 담깁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 이야기는 기막힌 우연의 연속처럼 보입니다. 하필이면 어머니가 더 이상 아이를 숨길 수 없게 된 그 시점에, 하필이면 바로의 공주가 목욕을 하러 내려왔고, 하필이면 갈대 숲 사이의 상자를 발견합니다. 저자는 이 모든 우연을 나열한 뒤, 2장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신음을 들으셨다고 적습니다. 즉, 저자는 이 모든 사건이 인간의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치밀한 섭리 속에 발생했음을 신앙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날이 선 칼날 위에 서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실재' 유무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이 모든 해석은 포이어바흐의 주장처럼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여 만들어낸 종교적 허상에 불과합니다. 이는 마치 신하들이 반정을 일으켜 허수아비 왕을 옹립해 놓고 그 앞에 스스로 무릎을 꿇는 기이한 연극과 같습니다. 겉모습은 왕에 대한 충성이지만, 실상은 인간이 왕을 만들고 지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 사유의 울타리 안에 갇힌 존재라면, 우리의 기도는 허공에 흩어지는 독백일 뿐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인간의 사유 밖, 그 너머에 실재하신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의 의심조차도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 안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불편함과 마주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면, 인간은 그저 각본대로 움직이는 마리오네트 인형에 불과한가? 우리는 로봇 취급을 받기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실패와 우발적인 사건들마저도 엮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거대한 지혜로 작동합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을 때, 그곳은 철저한 침묵의 공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답하지 않으셨고, 모세는 실패자로 남겨진 듯했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 하나님에 대해 논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존재 증명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해결해야 할 몫입니다. 인간은 오직 질문할 수 있을 뿐, 대답은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 "당신의 실재를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요구인지 깨닫게 됩니다.
만약 하나님이 당신의 압도적인 실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신다면, 죄인인 인간은 그 거룩한 불길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소멸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침묵하시거나, 역사의 이면으로 숨어 계시는 것은 무능함이 아니라, 우리가 감당할 수 있도록 거리를 두시는 '숨어 계시는 은총'입니다. 차라리 가만히 지켜보시는 것이 우리에게는 자비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갈대 상자를 다시 봅니다. 그것은 단순한 도피처가 아니라,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강물 위에 우리의 존재를 내어 맡기는 신앙의 원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당신이 계시다면 증명하십시오"라는 요구를 거두고, "당신은 증명할 의무가 없는 분이며, 저는 당신의 침묵조차 신뢰합니다"라는 겸손한 고백으로 나아갑니다. 우리의 인식과 이성은 한계에 부딪히지만, 바로 그 한계 지점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작점입니다. 강물은 흐르고, 상자는 어디로 갈지 모르지만, 그 흐름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안식할 수 있습니다. 광야의 침묵은 허무가 아니라, 곧 다가올 떨기나무 불꽃의 음성을 듣기 위한 거룩한 기다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