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2장 묵상: 죽은 믿음의 세계에서 믿음이 행위가 되는 단 한 번의 접점

야고보서 2장 묵상: 죽은 믿음의 세계에서 믿음이 행위가 되는 단 한 번의 접점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1절)

야고보의 시선은 1장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향합니다. 그의 카메라는 예배 공동체 내부의 한 장면을 클로즈업합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부유한 자는 상석으로 안내하고,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자에게는 발판 아래에 앉으라고 말하는 현실. 야고보는 이 장면이야말로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어떻게 죽어가는지를 보여주는 적나라한 증거라고 선언합니다. 믿음의 진위는 고상한 신앙고백이 아니라, 가장 연약한 이웃을 대하는 태도라는 불편한 현실에서 판가름 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5절)

야고보는 곧바로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교정합니다. 세상이 부와 권력으로 사람의 가치를 매길 때, 하나님은 오히려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택하여 믿음의 부요함을 주시고, 당신 나라의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라는 윤리적 권고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이는 세상의 가치 체계를 전복시키는 하나님의 혁명적 선언입니다. 따라서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는 것은 그들을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정면으로 반역하는 행위입니다.

“그대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 (19절)

믿음과 행위의 분리를 향한 야고보의 비판은 가장 날카로운 지점에 도달합니다. 그는 당시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신앙고백(신 6:4, 쉐마)을 정면으로 겨냥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라고 고백하는 이들에게 야고보는 말합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도 거기까지는 압니다. 심지어 당신보다 더 실감 나게 그 진리 앞에서 두려워 떨기까지 합니다." 이 얼마나 통렬한 지적입니까. 이것은 지적 동의로서의 믿음, 삶의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 믿음이 얼마나 공허하고 무력한지를 폭로합니다. 귀신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을 가르는 경계선은 '무엇을 아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내는가'에 있습니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26절)

마침내 야고보는 자신의 논증에 대한 최종적이고도 도발적인 결론을 내립니다. 그는 믿음을 몸에, 행위를 영혼에 비유합니다. 영혼이 떠난 몸이 아름다운 형체를 가졌을지라도 결국 시체에 불과하듯이 사랑의 실천이 없는 믿음은 아무리 그럴듯한 신학적 형태를 갖추었을지라도 죽은 것입니다. 이것은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그 본질상 선한 행위라는 생명의 증거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존재론적 선언입니다.

**단 한 번의 접점

존재와 행위, 믿음과 실천이 하나여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귀신도 압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 때부터 오늘날 나에 이르기까지 인류 역사에서 그 둘이 올바르게 통일을 이룬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앎은 언제나 우리의 삶을 배반했고, 우리의 다짐은 죄의 중력 앞에서 번번이 무너졌습니다.

그 완전한 실패의 역사 속에서 단 한 번의 예외, 단 한 번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행위가 완벽하게 만난 유일무이한 '접점(Tangent Point)',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에게는 말씀이 곧 삶이었고, 존재가 곧 행위였습니다. 인류가 실패한 그 완전한 연합을 그분 홀로 이루어내셨습니다.

우리의 이성은 이 지점에서 교묘한 유혹에 빠집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13절)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에 이론적으로 기대어 우리의 행함 없음을 합리화하고 무법천지로 살아가려는 유혹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회퍼가 경고한 '값싼 은혜'입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우리를 이끄는 곳은 행위주의의 덫도, 값싼 은혜의 나태함도 아닙니다. 그는 우리를 우리의 불가능성이 드러나는 절망의 자리로, 그래서 더욱더 유일한 접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리로 초대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에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하나님의 법이 우리 마음에 새겨지는' 새 언약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죽은 믿음에 생명의 영혼이 불어넣어질 때, 비로소 우리의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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