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장: 복과 죽음의 공존, 그리고 응답의 책임
출애굽기 1장: 복과 죽음의 공존, 그리고 응답의 책임
"그래서 하나님이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불어났고, 매우 강해졌다. 하나님은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집안을 번성하게 하셨다. 마침내 바로는 모든 백성에게 명령을 내렸다. '갓 태어난 히브리 남자 아이는 모두 강물에 던지고, 여자 아이들만 살려 두어라.'" (출애굽기 1:20-22, 새번역)
출애굽기 1장은 하나님의 신실한 복이 어떻게 가장 잔인한 비극의 씨앗이 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시작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 당시 최고의 복으로 여겨졌던 하나님의 선물이 애굽 사람들에게는 두려움과 시기가 되어 돌아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복은 곧바로 그들을 강제노역과 인종말살이라는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역설의 방아쇠가 됩니다. 복과 죽음이 한 문단 안에서 불편하게 공존하는 이 기이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고통의 원인이 되는가?
이 암흑 속에서 산파들은 한 줄기 빛과 같은 믿음의 결단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사람의 명령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고, 그 믿음의 행위로 하나님은 그들의 집안을 번성케 하는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야를 조금만 넓히면, 이 아름다운 신앙의 실천이 곧바로 '모든 남자 아이를 나일 강에 던지라'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혹독하고 체계적인 학살 명령의 빌미가 되었음을 봅니다. 산파 개인의 믿음은 상을 받았지만, 공동체 전체는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인간이 설령 선을 행했다 할지라도 그 선한 행위가 불러올 결과의 무게까지 온전히 감당할 수 없다는 인간 실존의 비극적 한계와 마주합니다.
우리는 이 모순을 이해하기 위해 3차원의 세계를 넘어선 4차원의 섭리를 이야기하거나, 두 개의 초점을 지닌 타원처럼 신비를 그저 끌어안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장 아들을 강물에 던져야 하는 어머니의 절규 앞에서 그 어떤 신학적 설명도 공허하게 들릴 뿐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위태로워지는 이 절체절명의 상황은 우리의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남습니다. 우리의 최선의 이해는 그저 '복과 저주의 공존'을 인정하고, 지금 당장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을 연장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출애굽기는 우리에게 책임의 본질을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결과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선하게 만들어 낼 '결과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이 산파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응답에 대한 책임(Responsibility to Respond)'입니다. 생명을 죽이라는 세상의 명령 앞에서 "아니오"라고 답하고, 생명을 살리라는 하나님의 마음에 "예"라고 답하는 것. 우리의 책임은 거기까지입니다. 그 응답이 어떤 나비효과를 일으키고, 세상을 얼마나 더 어둡게 만드는 것처럼 보일지는 우리의 손을 떠난 영역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은 결코 무책임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무한하심에 결과를 온전히 내어 맡기는 가장 깊은 차원의 신앙 고백입니다. 산파들의 의로운 '아니오'가 불러온 파라오의 광기 어린 명령은, 역설적이게도 한 아이를 갈대 상자에 담아 강물에 띄우게 했고, 바로 그 아이가 훗날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선한 행위가 초래한 최악의 결과마저도 당신의 구원 드라마의 가장 극적인 무대장치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결과를 저울질하며 주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다만 "예" 할 때 "예" 하고, "아니오" 할 때 "아니오" 하는 것입니다. 그 정직한 응답들이 모여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룰 것을 믿으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