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1장 묵상: '만드심'을 넘어 '낳으심'으로, 우리를 당신 안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

야고보서 1장 묵상: '만드심'을 넘어 '낳으심'으로, 우리를 당신 안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야고보가 세계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을 드립니다.” (1절)

묵상은 야고보서 저자의 넓은 시선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한 공동체를 넘어, '세계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를 품에 안습니다. 그들은 왜 흩어져야 했을까요? 나라를 잃은 정치적 디아스포라이자, 신앙 때문에 로마 제국 곳곳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했던 영적 디아스포라였습니다. 박해와 가난,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여러 겹의 시험 한가운데 서 있는 이들에게 야고보는 편지를 띄웁니다. 그의 첫인사는 고난의 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에서 비롯된 목회적 외침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받을 것입니다.” (5절)

야고보는 이 시험을 이겨낼 힘이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필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그러나 이 지혜는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이나 지식이 아닙니다.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인내로써 온전함을 이루어가는 하늘로부터 오는 분별력입니다. 그는 이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신다"고 약속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첫 번째 중요한 상을 만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꾸짖는 엄격한 심판관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결핍을 채워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후하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곧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17절)

야고보는 우리가 시험 중에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오해, 즉 '하나님이 나를 시험하신다'는 생각을 단호하게 바로잡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하거나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변함도,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절대적인 선의 근원이십니다. 우리 삶의 모든 좋은 것은 바로 이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고난 속에서 이 사실을 붙드는 것이야말로 시험을 이기는 지혜의 핵심입니다.

“그는 뜻을 정하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주셨습니다.” (18절)

마침내 묵상은 야고보서 1장의 심장부에 도달합니다. 이 구절은 저자의 놀라운 신학적 대담성이 빛나는 장엄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다'고 말하지 않고 '낳아주셨다'고 선포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단어의 선택이 아닙니다. 이것은 창조를 '만듦(making)'의 틀에서 '낳음(birthing)'의 틀로 전환하는, 혁명적인 신학적 재해석입니다. '만듦'이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거리감과 구별을 암시한다면(토기장이와 진흙처럼), '낳음'은 부모와 자녀 사이의 생명적 연결과 본성의 공유를 의미합니다.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독생자(only begotten), 즉 하나님에게서 나신 유일한 아들로 고백했습니다. 야고보는 바로 그 낳음의 관계를 진리의 말씀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로 과감하게 확장합니다. 이는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신 대로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의 신적인 연합과 관계 안으로 초대되었음을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가족, 그분의 본성을 물려받은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 진리 앞에서 우리는 때로 좌불안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거룩한 본성을 유한한 우리가 공유한다는 이 신비가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27절)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로서,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된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야고보의 대답은 명료합니다. 참된 경건은 종교적 의식이나 화려한 고백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의 성품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가장 연약한 이웃(고아와 과부)의 고통에 동참하는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에 물들지 않으려는 거룩한 자기 보존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그의 생명을 공유하고 있음을 세상에 증명하는 방식입니다.

우리의 언어 속으로 건너오신 하나님

'만드시는 하나님'과 '낳으시는 하나님'. 성서의 다양한 증언들은 때로 우리의 제한된 언어와 이해 속에서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조화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희미한 거울을 보듯 부분적으로 알 뿐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절실히 깨닫습니다. 우리의 불완전한 언어와 이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건너오시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주가 어떻게 아버지가 되시는지, 가장 초월적인 분이 어떻게 가장 친밀한 사랑이 되시는지를 보았습니다. '만드심'과 '낳으심'이라는 우리의 모든 언어적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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