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3장: 데오빌로에게 예수 죽음의 진짜 이유를 생각하도록 설계한 누가
누가복음 23장: 데오빌로에게 예수 죽음의 진짜 이유를 생각하도록 설계한 누가
2 그들이 예수를 고발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우리 민족을 오도하고,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고, 자칭 그리스도 곧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22 빌라도가 세 번째 그들에게 말하였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단 말이오? 나는 그에게서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를 찾지 못하였소. 그러므로 나는 그를 매질이나 해서 놓아줄까 하오."
23 그러나 그들은 마구 우기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큰 소리로 요구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소리가 이겼다.
27 백성들과 여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서 예수를 따라 가고 있었는데, 여자들은 예수를 생각하여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35 백성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고, 지도자들은 비웃으며 말하였다. "이 자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그가 택하심을 받은 분이라면, 자기나 구원하라지."
36 병정들도 예수를 조롱하였는데, 그들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신 포도주를 들이대면서,
37 말하였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나 구원하여 보아라."
38 예수의 머리 위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이다" 이렇게 쓴 죄패가 붙어 있었다.
41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예수께 말하였다.
56 그리고 그들은 집에 돌아가서, 향료와 향유를 마련하였다. 여인들은 계명대로 안식일에 쉬었다.
누가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외면적 세 가지 이유(2절)를 데오빌로에게 알려준다. 유대 민족 오도, 황제에게 세금 납부 반대, 그리고 자칭 그리스도로서 유대인의 왕이다. 누가는 이 이유로써 예수가 죽어야 했다고 데오빌로에게 쓰면서 부끄러웠을지도 모른다. 이 이유들이 고발 조건을 성립시킬 수 없다는 것을 누가도 알지만 데오빌로는 더 잘 안다. 2절을 읽자마자 로마 관리 데오빌로는 왜 예수가 십자가 형을 받았지?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의 죄패명은 로마 사람 데오빌로가 보기에 십자가 형을 받을만한 죄명이 아니다(38절). 그는 예수가 황제에게 바칠 세금을 반대하지 않았음을 이미 안다(눅 20장). 예수의 고발 조건은 로마 관리가 볼 때 성립될 수 없다. 데오빌로는 마침내 예수의 죽음에 대한 내적 이유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예수의 죽음의 이유를 궁금하게 만든 누가는 로마 사람 빌라도를 어느 정도 변호한다. 당연하다. 그의 편지를 읽는 데오빌로가 로마 사람이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잘 알았으나 다만 통치를 위한 정치적 판단으로써 유대 지도층이 건의한 십자가 형을 선택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정치인 그것도 로마 식민지를 무탈하게 관리해야 하는 총독 빌라도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계산과 선택이다. 누가가 계속해서 소개하는 빌라도는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장례를 치르려고 할 때 십자가형을 받은 죄인의 시신임에도 거절하지 않는다(50-55절).
예수가 죄가 없음에도 십자가 형을 받은 이유는 유대 기득권층의 정치적 입지의 위협과 불쾌한 감정, 그리고 빌라도의 정치적 선택이다. 여기까지 데오빌로를 인도한 누가는 한 걸음을 더 내디디려 한다.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하며 사탄의 시험을 받아야 했다(눅 4장). 그는 죽을 때도 시험을 받는다. 어떤 시험인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라면, 이를 증명하시오.’ 예수는 백지 답안지를 제출했다. 그것은 시험 출제자들이 원하는 답안지가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의 답안지를 쓰레기통에 넣었고, 그것은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온 피조물 구원의 증거문서가 되었다.
이제 누가는 데오빌로의 생각을 설계한다. 왜 예수는 공생애 시작 때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털끝 만큼의 기적도 행사하지 않을까? 누가는 데오빌로의 평가를 듣고 싶은 것이다. 자기것 먼저 챙기고 남을 챙기는 것도 귀한 것인데, 유대인들의 세칭 그리스도는 기적 행사를 포기한다. 사람들을 위해 먹이고 병을 치료할 때는 기적을 행사하던 이가 갑자기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돼버렸다. 데오빌로는 이 사람이 그리스도 컴플렉스가 심해 십자가 형도 마다하지 않는 것인가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예수의 기적 포기를 닮은 꼴이 구약에도 있다. 모세의 기도다(출 32장).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용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걸고 하나님을 협박했다. 신약에도 있다. 바울도 그리스도와의 체인에서 자신이 떨어져나가더라도 이스라엘이 그 체인에 묶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롬 9장). 예수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최고의 사랑이라고 한 말씀(요 15장)은 육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모세와 바울의 예처럼 영혼의 죽음도 포함한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 예수는 육신의 죽음을 넘어 영혼의 죽음 때문에 피땀을 흘렸다. 기적 행사조차 내려 놓았음에도 하늘이 반응하지 않자 예수는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 죽는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도 구약의 욥처럼 하나님께 마지막 물음을 골수(요즘말로 DNA)에 새겼다. <베니스의 상인>을 쓴 셰익스피어는 성서를 많이 읽은 것 같다.
숫자 3을 좋아하는 누가는 예수의 십자가 장면에서도 3을 동원한다. 예수의 죽음에 반응한 세 부류는 유대인 죄수, 로마인 백부장, 그리고 자연이다. 이스라엘과 그 경계 밖의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까지도 예수의 죽음에 반응했다. 예수의 죽음은 그렇게 누가의 고백(의도)대로 온 피조물을 포괄한다.
편지 수신자 데오빌로와는 별관계가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점을 함께 생각하고 싶다. 첫째는 비아 돌로로사를 걷는 예수를 따라가며 제 가슴을 치며 우는 여인들이다. 이 모습에 오늘날 한국 상황이 겹쳐 보인다. 오늘날 최고의 자식 교육 이벤트는 선거다. 선거야말로 어른들이 올림픽처럼 몇 년 만에 한 번 아이들을 가르치는 대규모 교육 축제다. 예수가 날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한 말씀이 오늘날까지 진리로 살아 있다. 2024년 현재, 한국의 교육 이벤트는 망했다. 교육은 백년대계라는데, 우리는 100년간 어두컴컴한 공간을 더듬거려야 할지 모른다. 과연 한국의 어른들은 제 자식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가? 둘째는 안식일법에 매이지 말라고 했던 예수가 죽었는데도 안식일법은 준수되어야 한다. 사람의 습관은 이토록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