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8장: 데오빌로도 예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 - 누가가 데오빌로를 설득하는 세 이야기

누가복음 8장: 데오빌로도 예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 - 누가가 데오빌로를 설득하는 세 이야기


5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발에 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쪼아먹기도 하였다.
6   또 더러는 돌짝밭에 떨어지니, 싹이 돋아났다가 물기가 없어서 말라 버렸다.
7   또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서, 그 기운을 막았다.
8   그런데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자라나,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15   그리고 좋은 땅에 떨어진 것들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서, 그것을 굳게 간직하여 견디는 가운데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 나의 어머니요, 나의 형제들이다.”
28   그가 예수를 보고, 소리를 지르고서, 그 앞에 엎드려서, 큰 소리로 말하였다. "더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30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대답하였다. "군대입니다." 많은 귀신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31   귀신들은 자기들을 지옥에 보내지 말아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48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우리는 1절부터 21절까지를 씨 뿌리는 비유로 보고 한달음에 읽어야 한다. 우리의 시선은 어디에 가 있는가? 씨 뿌리는 사람과 그의 행위인가, 아니면 각종 땅의 소득인가? 우리네 마음은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말을 증명하며 백 배의 결실에 매어 있다. 그러나 누가는 씨 뿌리는 이를 주목한다. 소득을 위한다면 좋은 땅에만 씨를 뿌려야 한다. 그러나 예수의 비유에 등장하는 농부는 바보처럼 옥토에만 씨를 뿌리지 않는다. 물론 이스라엘의 땅은 기본적으로 돌이 많은 땅인데다 농번기 때는 경작지였다가 농한기 때는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이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농부는 너른 땅이라도 작물이 잘 자라는 부분을 정확히 안다. 게다가 예수의 비유 해설은 농부의 관심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그분의 해설을 읽으며 우리는 아직도 땅의 소득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지만, 농부는 하나님의 말씀인 씨앗이 아무 능력을 보이지 못하고 소실되는 땅에 씨앗을 아까워하지 않고 뿌린다. 농부는 악마가 씨앗을 다 집어삼켜도,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인 세상사에 대한 근심과 재물 집착과 인생 향락에 씨앗이 잠식 당해도 포기하지 않고 씨앗을 뿌린다. 예수와 누가는 씨 뿌리는 이의 바보 같은 고집이 결국 땅을 이긴다고 힘주어 말한다(16절 이하). 그렇다, 예수는 씨 뿌리는 농부의 마음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누가는 15절과 21절을 연결했다. 좋은 땅은 혈육이라는 존재론적 관계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가는 편지를 읽는 데오빌로에게 당신의 출신 성분이 좋은 땅이 아닌 것은 당신도 나도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고 예수의 마음이 당신에게서 떠난 것은 아님을 말하고 싶다. 누가의 편지를 읽는 데오빌로의 마음이 얼마나 촉촉해졌겠는가. 씨 뿌리는 농부 예수의 마음과 그분이 땅을 가리지 않고 씨를 뿌리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자. 그럴 때 예수의 비유는 우리네 빈 들판 마음에 단비를 내린다. 

25절 이하의 군대 귀신 쫓아낸 사건도 어떤 땅이라도 개의치 않고 씨를 뿌리는 농부의 관점을 유지한 채 읽자. 예수는 좋지 않은 땅보다 더 심각해 보이는(28절) 많은 귀신들(군대)의 청을 묵살하지 않는다(31f.). 불현듯 복음서들에 예수가 귀신을 쫓아내는 기사들은 많지만, 그분이 귀신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없었구나 라는 생각이 스친다. 지금까지 우리는 천동설처럼 인간 중심에서 성서를 읽었다. 적어도 인간만이 아닌 온 피조물로 중심이 확장되어야 할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지동설처럼 하나님을 중심으로 온 피조물이 움직여야 한다. 인간의 대적으로서 귀신이라는 구도에 매몰되면, 인간 이외 다른 피조물은 정복의 대상이 된다. 환경 파괴로 인한 기후 위기는 인간 중심의 한계를 정확히 지시한다. 

이어지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는 이야기와 거기에 삽입된 혈루병 앓던 여인의 이야기도 데오빌로를 설득하는 누가의 관점에서 읽으면 이 두 사건이 단지 시간순서에 따라 배열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번은 예수가 이방 여인에게 자신은 유대인을 위하지 너 같은 이방인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고 대놓고 말했다(마 15; 막 7). 누가복음 7장의 백부장처럼 예수와 연관되어 등장하는 이방인들은 하나 같이 믿음이 좋다. 결국 예수는 자신이 무시한 이방 가나안 여인의 청을 수락한다. 유대인 회당장의 딸을 살리러 가는 도중에 12년간만 아니라 아예 고쳐지지 않을성 싶던 혈루병을 앓는 이가 예수의 옷에만 손을 대도 나음을 입은 사건을 읽는 데오빌로는 누구에게 마음이 갈까? 데오빌로도 예수의 옷에 손을 대면, 그러니까 누가의 편지를 가슴에 담고 내게도 은혜를 베푸소서 라고 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청은 묵살되지 않을 것이다.  

누가는 7장에 이어 8장에서도 데오빌로를 세 번 설득한다. 사실상 누가는 자신의 편지 곳곳에 데오빌로에게 덫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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