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7장: 예수의 하찮은 용서

누가복음 17장: 예수의 하찮은 용서


5   사도들이 주님께 말하였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6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9   그 종이 명령한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16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런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겨자씨 한 알의 믿음으로써 뽕나무를 바다에 심을 수 있다는 예수의 말씀에 우리네 욕망은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우리는 겨자씨 한 알만 투자하면 기적이 일어나거나 그런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고 오해한다. 소위 겨자씨를 뻥튀기 해보자는 거다. 아니다. 예수는 겨자씨처럼 작은 일, 일상의 신앙을 말씀했다. 큰 돈이 오갈 때는 서류를 남긴다. 그런데, 커피 한 잔 사면서 차용증을 남기는 사람이 있는가? 예수가 말씀한 겨자씨는 신앙적 결단이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는 자연스러운 선택과 결단을 가리킨다. 형제가 내게 일곱 번 죄를 지은 것을 일곱 번 용서할 만큼의 하찮은 일이다. 그런데, 누가는 진정 데오빌로에게 예수의 제자가 갖추어야 할 용서의 자세를 말하고 싶은 것일까? 

누가는 이 에피소드에서 데오빌로가 예수의 하찮은 용서를 알기를 바랐다. 예수의 하찮은 용서는 데오빌로에게 뽕나무가 바다에 심기우는 기적으로 다가간다. 그런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일곱 번 반복되어도 예수에게는 겨자씨 만한 하찮은 일이다. 예수의 용서는 그분의 속사정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용서를 비는 이에게는 하도 당연해서 하찮게 다가온다. 그분의 용서는 종이 주인의 명을 고민하고 결단한 후 따르지 않고, 종이니까 주인의 명에 반응하는 것과 같다. 그분의 용서는 요즘말로 DNA에 새겨진 용서 본성이다. 이것을 시간의 축에서 보면 만세 전 예정과 선택이고, 공간의 축에서는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우리에게 익숙한 주고받음(give&take)에서는 보상을 기대하지 않음이다. 친구에게 커피 한 잔 권하는 것도 우리네 일상사인데, 하물며 당신의 자녀라 부르는 이에게 보상을 바라고 커피를 테이크아웃 하는 부모는 없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예수의 하찮은 용서를 받으라고 권한다.  

누가는 그분의 겨자씨 만한 용서가 지니는 하나님의 구원사적 의미와 특히 거기서 데오빌로의 위치도 감추지 않았다.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끝내 땅 끝까지 이르러야 할 예수의 복음의 파동은 이제 막 사마리아인을 넘었다(16절). 로마 총독 빌라도가 유대인 청년 예수를 내란죄로 엮어 죽이는 것은 노아와 롯 시대의 사람들의 일상과 같다. 지진파는 땅과 바다와 건물이, 그리고 나의 몸이 흔들릴 때 느낀다. 예수가 일으킨 지진파는 어느새 데오빌로에게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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