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사 49:13-23)
#성탄절 후 주일
13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14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17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18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를 장식처럼 몸에 차며 그것을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
19 이는 네 황폐하고 적막한 곳들과 네 파멸을 당하였던 땅이 이제는 주민이 많아 좁게 될 것이며 너를 삼켰던 자들이 멀리 떠날 것이니라
20 자식을 잃었을 때에 낳은 자녀가 후일에 네 귀에 말하기를 이곳이 내게 좁으니 넓혀서 내가 거주하게 하라 하리니
21 그 때에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나를 위하여 이들을 낳았는고 나는 자녀를 잃고 외로워졌으며 사로잡혀 유리하였거늘 이들을 누가 양육하였는고 나는 홀로 남았거늘 이들은 어디서 생겼는고 하리라
22 주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뭇 나라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민족들을 향하여 나의 기치를 세울 것이라 그들이 네 아들들을 품에 안고 네 딸들을 어깨에 메고 올 것이며
23 왕들은 네 양부가 되며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본문은 교회력으로 성탄절을 지키고 나서 읽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입니다. 예언의 말씀이 그렇듯 결국은 구원입니다. 본문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끝내 구원하겠다는 내용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간 것에서 해방시키겠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걸림돌
하지만 저는 본문을 읽은 후 생각이 복잡해졌습니다. 특히 20절에서 멈칫했습니다.
“자식을 잃었을 때에 낳은 자녀가 후일에 네 귀에 말하기를 이곳이 내게 좁으니 넓혀서 내가 거주하게 하라 하리니”
제가 20절에서 잠시 멈칫한 이유는, 마태복음 2장의 피바람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성탄하실 때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 유대 땅까지 와서 헤롯에게 찾아가 ‘유대인의 왕이 어디에 나셨느냐?’라고 묻자, 헤롯은 왕좌의 침탈을 염려해 동방박사들이 처음 별을 발견한 시점을 계산하여 아래위로 넉넉하게 잡아 베들레헴과 그 근방에 사는 두 살 아래 사내아이를 학살하는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 하늘에는 영광이고 땅에는 평화라고 했는데, 베들레헴의 영아살해 사건은 그 말을 무색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탄생했는데, 사람의 아기가 죽어나갑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라고 하면서, 베들레헴의 영아살해 사건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낮은 곳에 비천하게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 충격적인 사건의 현장을 덮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여쭈어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심이 천사들도 땅에는 평화라고 했는데, 실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아기의 집단 학살입니다. 이것을 대체 어떻게 이해하면 좋겠습니까?”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이 어둠에 빛이 비취는 것이라고 하고, 죽음 위에 생명이 임하는 사건이라고 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하고 감격하여 찬양하는 가사는 아이들의 살해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눅 1:48-53)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 때 베들레헴에서는 헤롯의 칼날에 아기들의 피가 낭자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탄생 때 집단살해가 일어난 것, 그것도 아기들이 칼에 희생된 것을 어떻게 보십니까?
신앙이란 무엇인가?
본문은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15)
베들레헴에서 살해된 아기들의 비명은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는 시온의 통곡 소리입니다. 내 아기가 헤롯의 칼날에 베임을 당하는 것은 주님이 버리신 것이고, 주님이 나를 잊으신 것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내가 너를 버리지도 잊지도 않았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신앙이 종교생활을 하는 것에서 얻는 작은 위로나 위안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16)는 말씀이 힘도 되고 위로도 되나, 내 아이가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이 말씀을 들으면 위로가 아니라 고통스럽다 못해 죄다 거짓말로 들립니다. 우리 신앙은 무언가에 기대어서 얻는 작은 편안함이나 부적 하나 몸에 지니고 있어서 안심하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아이가 죽어 나가는데도 우리 귀에는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야만 하는 적나라한 현실에 매인 신앙입니다.
조금만 멀리, 조금만 더 넓게 봅시다.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라는 천사들의 합창을 듣고 태어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사셨고, 그렇게 산 결과로서 어떻게 죽었는지를 차분히 생각해 봅시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어떻게 그리도 허무하게 죽습니까? 아무 힘도 없이,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하고 도살장으로 향하는 어린 양처럼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모습이 마치 헤롯의 칼날에 피 흘리며 죽어갔던 아기들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고난과 십자가를 피할 수 없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졌다 할지라도, 우리는 세상 권세를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분이 하늘에 속해 있음에도 우리는 헤롯의 칼날에 희생되고, 고난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다 쥐구멍에도 드는 빛 한 번 못 보고 그대로 거센 물결 속으로 가라앉고 말 것입니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 세례 요한 만한 이가 없다고 했으나 그런 사람도 헤롯의 칼에 목이 잘립니다. 이처럼 우리는 세상의 권세를 이기지 못합니다. 세상의 유혹이 오면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달린 어느 살인자처럼 그렇게 우리도 십자가에 달릴 것입니다. 세상 권세는 그들이 원하는 바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한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가 마침내 주님처럼 십자가에 매달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주님 나 같은 것도 불쌍히 여겨달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주님은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호소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무참히 학살된 아기들의 죽음과 다를 바 없다면,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은 아기들의 부활일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은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주님의 선언이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들리기를 소망합니다.
동병상련
이제 우리는 다른 시각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헤롯의 칼날에 죽어가던 아기들처럼 죽임에 이르는 예수님을 봐야하겠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실 때 비록 당신이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의 한계를 그대로 지닐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연약함을 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부는 피바람을 예수님 조차도 어쩔 수 없이 고스란히 당해야 했고, 마침내 죽임에 이르게 되었을 때도 갖은 조롱을 받아도 예수님은 저항하지 못하고 죽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완전히 세상 권세에 내동댕이쳐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세상 권세 아래에서 유혹을 당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처지를 이해하십니다. 또한 주님은 세상 권세가 철저히 우리를 이용하다 마침내 칼로 내리치는 것도 다 아십니다. 본문 18절은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내 백성을 구원하겠다는 것을 당신의 삶을 들어 맹세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세상 권세에 농락 당하다가 죽어간 예수님의 모습에서, 아기들 목숨 하나 건지지 못한 하나님 아들의 무기력한 탄생에서 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무참히 짓밟힌 우리를 당신의 부활로 부르십니다. 세상 권세가 휘두르는 칼을 받아야 했던 우리를 승리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본문 23절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우리에게 닥친 절체절명의 순간이 지나는 그 시간에, 그 현장에서 우리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필코 우리 입술로 ‘내가 주님이 여호와신 줄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하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나를 위하여 이들을 낳았는고, 나는 자녀를 잃고 외로워졌으며 사로잡혀 유리하였거늘, 이들을 누가 양육하였는고 나는 홀로 남았거늘 이들은 어디서 생겼는고 하리라.(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