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거룩한 탄생 (마 1:18-23)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성탄 시즌에 부르는 어린이 찬송 중에 <탄일종>이 있습니다. 가사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종소리가 깊고 깊은 산골 초라한 집에 사는 사람에게도 울린다는 내용입니다. 누구나 예수님의 성탄을 알 수 있고,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탄일종이 어린이들의 맑은 입술에서 불릴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성탄(聖誕)이라는 말은 거룩한 탄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거룩한 탄생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을 읽는 우리의 화두는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왜 거룩한가?”

거룩한 탄생

처녀 마리아가 성령의 능력으로 기적처럼 예수님을 임신한 것을 두고 거룩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성령을 통해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했다는 것이 거룩한 탄생을 가리키고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태어남을 거룩한 탄생이라고 하는 가장 적절한 이유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거룩하다고 말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가 죽을 때 매겨집니다. ‘이 사람은 사랑의 원자탄이었다. 그는 개차반의 인생을 살았다.’ 이러한 것들은 그가 죽을 때 그의 일생을 결산하며 내리는 평가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평가를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제 갓 태어난 애기에게 이 사람은 참으로 성실하고, 인격이 고상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아기가 커서 그런 사람이 되라고 덕담을 합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 그분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니, 우리의 구원자니, 우리의 주님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랍비, 그러니까 선생님(스승) 정도였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존재를 알아본 존재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사람이고, 다른 한 부류는 사탄입니다. 어느날 예수님이 길을 가다가 갑자기 제자들에게 질문했습니다(마 16:14-16).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이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가 듣기에는 백 점짜리 대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에 찬물을 확 끼얹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복이 있다. 그렇지만 이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러니까 베드로, 네가 정답을 말했지만, 실은 너도 잘 모르고 대답했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과 동고동락했지만, 그분이 정말 누구신지는 몰랐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았다면, 정작 그분이 십자가를 질 때 도망가거나 외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아본 다른 한 부류는 사탄입니다. 예수님이 귀신들을 내쫓을 때마다, 그들이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마 8:29). 사탄이 예수님의 존재를 알아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우리를 괴롭히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이렇듯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아본 사람은 사탄 말고는 없었습니다. 비록 베드로가 정답을 내놓기는 했으나 예수님은 만점 처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임마누엘의 사랑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신기하게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자신들의 선생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로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탄생도 거룩한 탄생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왜 그랬을까요?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예수님과 겪은 일들을 다시 짚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의 스승이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친구해 주었던 것, 목숨을 내놓고서 안식일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병든 사람을 고쳐 주신 것(막 3장) 등을 제자들은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스승을 존경하다보니 마침내 선생님의 죽음을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까지 높여버린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스승이 매달린 십자가와 그 이후의 부활을 접하면서, “우리 스승 예수님이야 말로 정말 임마누엘이셨구나!”라고 깨닫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왜 예수님은 우리는 물론이고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과 함께 있으려고 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이 고민을 거듭하여 얻은 결론은 ‘사랑’입니다. 그들의 결론이 예수님이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다 데까지 이르자,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으면서까지 함께했던 사람들을 사랑했다는 사실에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제자들은 임마누엘(함께 있음)의 끝이 십자가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어느 날 솔로몬에게 두 여인이 찾아 왔습니다. 한 아기를 두고 두 여인이 서로 자기 아이라며 싸웠는데, 누구 아이인지를 판결해 달라고 솔로몬에게 나온 것입니다. 솔로몬은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아이를 둘로 나눠서 반쪽씩 주라’고 판결합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한쪽 여인이 울면서 자기 아이가 아니라고 하면서 상대 여인에게 아이를 주라고 하며 잘못했다고 빕니다. 누가 아이의 진짜 엄마입니까? 어서 아기를 반쪽으로 나눠서라도 달라고 악을 쓰는 여자입니까? 아이의 엄마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입니까?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며 사랑하는 제 아기를 살리려는 아이가 진짜 엄마 아니겠습니까. 사랑이 마침내 목숨까지 요구할 때, 참 사랑은 자기 목숨을 내놓습니다. 죽을 이유가 없어도, 아니 죽을 이유가 사랑한다는 것 뿐임에도 죽겠다고 나서는 것이 사랑의 끝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도 사랑의 마지막은 죽음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요 15:13)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이 바로 자신들의 스승임을 알았을 때, 제자들은 전율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자기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모든 사람을 사랑했기에 예수님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에 대해 정답을 말하게 하신 성령이 제자들의 생각이 깊어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계속 생각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나의 무엇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제자들은 살을 지져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도장을 찍어 놓은 듯한 자신들의 죄성을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다다른 제자들은 스승이 십자가 질 때 도망갔던 것과는 정반대로 스승의 이름, 예수(임마누엘)를 전하러 나섭니다. 그렇게 제자들은 스승의 뒤를 좇아 죽습니다. 그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사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함민복 시인의 <눈물은 왜 짠가>라는 시입니다.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 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 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 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예수님의 탄생은 제자들에게 거룩한 탄생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의 생각을 뒤좇아 본 것들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후 제자들이 한 생각, 반성, 깨달음입니다. 우리도 제자들의 생각을 뒤좇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보면서, 마리아에게 역사하셨고, 베드로의 입술을 움직이셨고, 제자들의 생각을 여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예수님의 탄생이 거룩한 탄생임을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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