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9 : 성서가 걷는 좁은길

3절: 주님의 목소리가 물 위로 울려 퍼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로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큰 물을 치신다

어떤 일을 하려면 사람은 땀을 흘려야 하지만, 하나님은 말로 다 된다. 시편 29편에서 식물, 동물, 물, 땅, 하늘,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한다. 하나님이 자연, 곧 세상을 다스린다. 하나님이 세상을 포괄한다. 하나님이 세상보다 위에 존재한다. 이것들은 하나님을 위계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능력의 차원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다. 성서는 이 모든 표현을 하나의 문장으로 집약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창조주 하나님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점이다. 거기에 이르는 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그러니까 하나님의 실재로부터 출발하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아래에서 위로 치닫는 길이다. 이 길은 두 갈래로 갈린다. 하나는 인간 사유 또는 종교심의 프로젝션의 결과물이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 사유의 투사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실재로부터 출발하려는 시도이다. 이 길은 위에서부터 아래로의 길처럼 보이지만 인간 사유의 추상을 벗어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신학도 마찬가지로- 이 두 가지 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거나 중간 지점에 어정쩡하게 발을 디뎠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길을 걷는다.

요청된 신을 이해하기란 쉽다. 그러나 인간 사유를 벗어난 하나님의 실재는 사람 손에 쉽게 잡히지 않는다. 사유를 사유한다고 해도 안 된다. 유명한 철학자들은 자아를 들여다봤다. ‘현실의 나’, ‘현실을 부정하는 나’, 그리고 ‘현실의 나와 현실을 부정하는 나를 바라보는 나’가 그것이다. 이 구도의 엔진은 아무리 돌아도 제자리에서 맴돌거나 상승이라는 욕망과 희망을 담은 착각일 뿐이다. 이 엔진을 수천년을 돌리고 있는데도 이 정도의 결과라면 충분히 검증된 것 아니겠는가!

이것만은 확실하다. 창조주 하나님의 실재는 욕망이든 소망이든 그런 것들을 담고 있는 인간 사유의 투사가 아니어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비인간적인, 너무도 비인간적인 타자여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의 알아줌과 별개로 당신의 길을 간다. 결국 창조주 하나님의 소명과 자기 보여줌만 남는다. 성서는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과 접촉했다고 본다. 성서는 종교심의 관찰과 적용이라는 안전한 자리를 모른다. 성서는 예수를 붙잡고 스스로 낭떠러지에 선다. 그만큼 성서는 좁고 불편하고 편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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