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개울의 고발장과 변호사이신 하나님 (욥기 6장)
욥의 살갗은 무쇠나 돌이 아니다(욥 6:12). 연약한 피부를 지닌 사람이다. 전능자가 쏘신 독화살이 영혼 깊숙이 박혔고 벗들마저 교리의 화살을 쏘아댄다(욥 6:4). 안팎으로 쏟아지는 화살 앞에서 사람이 어찌 버텨내겠는가. 절망한 사람이 전능자 경외하기를 저버리지 않으려면 벗의 한결같은 사랑(חֶסֶד, 헤세드)이 있어야 한다(욥 6:14). 그러나 친구들은 사막의 개울(נַחַל, 나할)처럼 변덕스러웠다(욥 6:15). 겨울 눈과 얼음으로 불어났다가도 정작 목마른 대상들이 찾아오는 더위에는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린다(욥 6:16~18). 데마와 스바의 행인들이 마른 바닥 앞에서 허망하게 스러진다(욥 6:19~20). 친구들의 배신은 인간적 섭섭함을 넘어 욥이 붙들던 인애의 하나님 상마저 바짝 말려 버린다.
친구들은 왜 고통받는 벗의 편이 되어 주지 못했는가. 본문은 그들이 욥에게 닥친 두려운 참상을 보고 겁을 집어먹었다고 폭로한다(욥 6:21). 저 불행한 자의 편에 섰다가는 자기들에게도 불벼락이 떨어질까 두려웠다. 자기 안전을 도모하려고 고아를 제비 뽑듯 친구를 팔아넘기고 재빨리 검사석으로 도망쳤다(욥 6:27). 모세는 금송아지를 만든 백성을 위해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워 달라고 매달렸다(출 32:32). 바울도 동족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한다고 외쳤다(롬 9:3).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룻강아지의 길을 택했다. "하나님, 내 벗이 무엇을 그리 잘못했다고 이러십니까"라며 옷자락을 물고 늘어지는 무모한 탄원이 욥에게는 없었다. 탄원서를 써 줄 파라클레토스는 어디에도 없다. 욥은 절망의 투명 캡슐에 갇혔다.
그럼에도 욥은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며 물러서지 않는다(욥 6:24). 자신이 죄 없는 완전무결한 인간이라고 우기는 말이 아니다. 친구들이 들이민 고발장 속의 하나님을 도무지 받아들일 길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네 상식으로도 법정에서 고발자 노릇을 하는 검사는 하사탄(הַשָּׂטָן)의 역할 아닌가(욥 1:6). 구약의 베리트(בְּרִית, 언약)는 공로와 벌점을 계산하는 쌍무 계약과는 거리가 멀다. 에른스트 쿠치가 밝혔듯 하나님의 일방적인 자기 의무 부과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처럼, 욥이 믿는 분은 심판대 앞에서 나를 변호해 주시는 인애의 하나님이다(롬 8:26, 33~34). 바르트의 지적대로 친구들은 하나님 어깨너머로 세상을 내려다보며 경건한 거짓말로 하나님을 검사석에 가두었다.
욥은 이 하나님 이해를 죽음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이만의 매서운 결기다. 소금 빠진 음식과 달걀 흰자위처럼 역겨운 고통 속에서 입맛마저 다 사라졌다(욥 6:6~7). 자신이 어떤 음식을 삼키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기력이 바닥나기 전에 차라리 하나님이 손을 들어 당장 숨을 끊어 주시기를 구한다(욥 6:8~9). 그러면서도 그 죽음을 가리켜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라며 자기의 위로요 기쁨이라고 부른다(욥 6:10). 살겠다고 친구들의 고발장에 도장을 찍어 내 하나님을 피도 눈물도 없는 검사로 모독할 수는 없다. 차라리 변호사이신 하나님을 품은 채 죽겠다는 선언이다. 육신의 입맛은 마비되었을지라도 속임을 가려내는 영혼의 미각(חֵךְ, 헤크, 입천장)은 아직 살아 있다(욥 6:30).
내 몸에 독화살을 쏘신 분과 나를 변호하실 분이 한 분이라는 모순을 욥은 어떻게 견뎌내는가. 하나님이 치료하지 못할 독화살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성전 벽이 무너져 기도하던 사람이 숨지는 참극이 벌어져도 마찬가지다(참조 눅 13:4). 하나님께 영광이 될 리 없어 보이는 폐허 너머에도 우리 시각을 아득히 넘어서는 하나님의 차원이 분명히 존재한다. 부끄러운 일은 우리의 이중 잣대다. 나의 구원에서는 그토록 쉽게 하나님의 초월적 인애를 인정한다. 정작 남의 구원과 남의 불행 앞에서는 순식간에 인과응보의 자를 들이대며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는다. "너희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는 욥의 외침을 보라(욥 6:28~29). 돌아오라(שׁוּבוּ, 슈부)는 회개의 명령은 타인의 불행 앞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한 우리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