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집의 헛곡과 흉기가 된 정답지 (욥기 5장)
엘리바스가 쏟아내는 말들은 구절마다 반듯하다. 하나님은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가난한 자를 칼에서 구출하신다(욥 5:11, 15).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손수 고치신다(욥 5:18). 잠언이나 호세아서에 그대로 옮겨 놓아도 아멘이 나올 정통 교리다(잠 3:11~12; 호 6:1). 그런데 이 옳은 말들이 잿더미에 앉은 욥의 귓전을 때릴 때는 무거운 흉기로 돌변한다. 십자가 발밑에서 시편 구절을 읊으며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던 자들의 소리와 똑같이 공명한다(마 27:40, 43; 시 22:8). 칼 자체가 나쁜 도구는 아니다. 주방장의 손에 들리면 식탁을 살리는 요리 도구가 되나, 강도의 손에 들리면 사람을 찌르는 흉기가 된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도 누가 어디서 휘두르느냐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칼날이 되지 않는가.
데만 사람의 연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위로인지 저주인지 분간조차 없다. 미련한 자가 뿌리 내리는 모습을 보고 그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다(וָאֶקּוֹב, 바에코브)고 자랑삼아 말한다(욥 5:3). 그 자식들은 성문에서 억눌려도 구해 줄 이가 없다고 덧붙인다(욥 5:4). 한날한시에 집이 무너져 열 자녀를 모두 잃은 아비의 코앞에서 무너진 집과 죽은 자식을 예증으로 끌어오는 셈이다(욥 1:18~19). 연설 끝머리에서는 징계를 달게 받으면 장막이 평안하고 자손이 땅의 풀처럼 많아지리라고 약 올리듯 보장한다(욥 5:24~25). 상주를 위로하러 왔다가 길을 잃었다. 자기 머릿속에 쌓인 교리를 토하듯 쏟아내느라 눈앞의 피 흘리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옛 초상집에는 상주를 대신해 울어 주는 곡꾼이 있었다. 문상객과 멀쩡히 농담을 주고받다가도 새 조문객이 대문을 들어서면 돌연 '아이고 아이고' 가락을 뽑아낸다. 소리만 요란할 뿐 애통하는 속내가 텅 빈 헛곡이다. 이 훈계자의 화려한 변론이 딱 그 초상집의 헛곡처럼 들린다. 처음 이레 동안은 그도 겉옷을 찢고 욥 옆에 주저앉아 입을 다물었다(욥 2:13). 그러나 상주가 진짜 피를 토하며 생일을 저주하자 준비해 온 조문객의 가락이 깨져 버렸다(욥 3:1~3). 엘리바스는 잿더미에서 벌떡 일어나 "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라며 욥의 비명을 가로막는다(욥 5:1). 바르트의 지적처럼 그는 전능자를 다 파악한 '열린 책'처럼 들고 서서 읽을 뿐, 끝까지 상주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을 줄을 몰랐다.
데만 사람은 자신의 말이 오랜 세월 갈고닦은 연구한 바(חֲקַרְנוּהָ, 하카르누하)라고 도장을 찍는다(욥 5:27). 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는 시늉만 하다가 세월이 차서 졸업장을 받은 꼴이다. 학적부에는 공부했다고 기록되겠으나 속은 텅 빈 깡통이다. 슈타우피츠가 강단의 현학적인 분석들이 종기보다 욥을 더 고문한다고 탄식하며 설교를 접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는 오만한 가정법에는 상처 입은 살갗의 떨림이 없다(욥 5:8). 아픔을 통과한 성찰이 빠진 경험은 아무리 오래 묵어도 빈 깡통 소리만 요란하다.
이 우등생에게 신앙이 없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나님 지식 시험을 치른다면 교리를 줄줄 암기한 그의 점수가 욥보다 훨씬 높을지도 모른다. 다만 같은 한 분 하나님을 부르는데도, 그가 책으로 외운 하나님과 욥이 온몸이 부서져 가며 알아가는 하나님은 그 내용이 전혀 다르다.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는 마지막 호통을 보라(욥 5:27). 그에게 모자란 덕목은 신앙이 아니었다. 부서진 사람 앞에서 자기 정답지를 접어 둘 줄 아는 겸손, 우리네 말로 기본적인 인간성이 그에게는 없었다. 암기한 백 점짜리 교리로 형제의 귀에 구멍을 내는 신앙이라면, 차라리 잿더미에 함께 주저앉아 입을 다무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