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지는 믿음의 뼈에 새긴 창조주의 빛 (욥기 3장)
핵심 요약: 칠 일 밤낮의 침묵 끝에 터져 나온 욥기 3장의 생일 저주는 죽음으로 도피하려는 비명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면 왜 죽음 너머의 안식이 이 땅에는 없느냐는 반문이다. 사방을 가로막힌 채 창조의 빛과 토브를 이중성으로 겪어내며,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지는 믿음의 뼈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새겨 달라고 부르짖는 욥의 청원을 살펴본다.
칠 일 밤낮의 침묵을 깨고 터져 나온 생일 저주
칠 일 밤낮의 침묵을 깨고 마침내 욥이 입을 열어 자기 생일을 저주한다(욥 2:13, 3:1). 사탄과 아내는 줄곧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 부추겼으나(욥 1:11, 2:9), 욥은 하나님을 저주하는 대신 자기가 태어난 날과 잉태된 밤을 겨냥한다(욥 3:3). 태중에서 죽었거나 모태의 문이 닫혔더라면, 어머니의 무릎과 젖이 자기를 받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평안히 누워 잤으리라 탄식한다(욥 3:10~13).
죽은 자들의 안식과 산 자의 땅을 가르는 상식에 대한 반문
우리네 상식은 죽은 자들이 누운 곳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정지된 공간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욥기 3장 17~19절이 그리는 풍경은 전혀 다르다. 거기서는 악한 자의 소란이 그치고 피곤한 자가 쉰다. 죄수가 감독자의 호통을 듣지 않으며, 작은 자와 큰 자가 나란히 서고 종이 주인에게서 놓인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걱정과 억압이 사라지는 안식의 세계다. 죽은 자의 세계와 산 자의 세계를 가르는 선은 사람의 눈이 그은 경계일 뿐, 근본적으로는 어디나 하나님의 나라다. 욥은 왜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이 이토록 다른지 묻는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면 이 땅에서도 저 안식이 이루어져야 마땅하지 않느냐는 반문이다.
창조의 빛과 토브가 이 땅에서 겪는 이해 불가의 이중성
질문은 창조의 첫 선물인 빛(אוֹר, 오르)과 생명(חַיִּים, 하임)을 향한다. "어찌하여 고난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욥 3:20). 사탄이 축복의 보호막이라 시기했던 바로 그 울타리(שׂוּךְ, 수크, 욥 1:10)가, 이제는 앞길을 감추고 사방을 가로막는 장벽(סוּךְ, 수크, 욥 3:23)으로 욥을 가둔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טוֹב, 토브, 창 1:4)고 선언하신 빛이 왜 이 땅에서는 사방이 막힌 자의 숨을 헐떡이게 하는 이중성으로 경험되어야 하는가? 강 건너의 실재를 어렴풋이 포착하되 인간 이성으로는 속속들이 알 길 없는 영역을 향해 욥이 질문을 던진다.
기울어지는 믿음을 곧세워 달라는 청원과 뼈에 새겨진 신실하심
천 갈래로 갈라진 마음으로 쏟아내는 욥의 탄식은 땅바닥을 보며 뱉어내는 구토에 머물지 않는다(욥 3:26). 하늘을 향해 정면으로 던지는 처절한 질문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지만 그 믿음이 피사의 사탑처럼 위태롭게 기울어져 넘어질지도 모르니, 뼛속에 철심을 박아서라도 곧세워 달라는 청원 아닌가. 심연의 바닥을 기던 인간 욥은 사방을 막아 놓고도 기어이 빛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그 순간에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과 뜻과 영혼을 머리 꼭대기까지 끌어올려 부르짖던 그 빛 아래서, 하나님은 마침내 당신의 신실하심을 욥의 머리와 뼈에 새기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