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일의 뿔나팔과 거류민의 안식 (레위기 25장)

핵심 요약: 레위기 25장은 칠 년마다 땅을 묵히는 안식년의 침묵을 지나, 오십 년마다 온 땅에 울려 퍼지는 거대한 양각 나팔의 굉음으로 나아간다. 밭에 씨를 뿌리지도 않고 포도나무를 가꾸지도 않으며 흙이 스스로 숨을 쉬게 하는 이 멈춤의 계절 한가운데서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을 향해 해방의 자유를 공포하신다.

레위기 25장은 칠 년마다 땅을 묵히는 안식년의 침묵을 지나, 오십 년마다 온 땅에 울려 퍼지는 거대한 양각 나팔의 굉음으로 나아간다. 밭에 씨를 뿌리지도 않고 포도나무를 가꾸지도 않으며 흙이 스스로 숨을 쉬게 하는 이 멈춤의 계절 한가운데서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을 향해 해방의 자유를 공포하신다. 그러나 이 해방의 나팔 소리는 풍년의 수확을 기뻐하는 잔치 마당이나 새해를 맞이하는 활기찬 아침에 울리지 않는다. 백성이 제 옷을 찢고 가슴을 치며 금식하는 날, 지성소 휘장 앞에 수송아지의 피를 들이붓고 아사셀 염소를 광야로 떠나보내며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대속죄일(일곱째 달 열흘날) 저녁에야 비로소 그 거친 나팔이 길게 울려 퍼진다. 자유의 선언은 가장 참혹한 죄책의 고백과 속죄의 피비린내 속에서 비로소 터져 나온다.

우리는 흔히 안식과 희년을 저절로 굴러가는 하나님의 자동화된 섭리나 때가 되면 주어지는 안락한 쉼으로 여기기 쉽다. 육 년째에 삼 년 치의 소출을 몰아주신다는 계산에 기대어 아무 근심 없이 찾아오는 은혜의 회복을 낙관한다. 그러나 레위기 25장의 나팔 소리는 결코 값싼 위로의 배경음악이 아니다. 희년이 도래하기 직전의 세상은 가난한 형제가 토지를 잃고 자식마저 남의 집 종으로 팔려 가며 절망이 극에 달한 자리이다. 그 빚을 탕감하고 종을 풀어주어야 하는 사람에게 희년의 나팔은 축제가 아니라 제 손에 쥔 재산을 강제로 포기해야 하는 날벼락 같은 손실이다. 인간의 손에 쥐어진 계산기는 끝내 탕감과 해방의 소리를 거부했다. 구약의 역사는 이스라엘이 희년의 나팔에 온전히 순종하여 땅을 돌려주었다는 기록을 단 한 줄도 남기지 않는다. 그들은 위기가 닥쳤을 때 마지못해 종을 풀어주었다가도, 형편이 풀리자마자 다시 멱살을 잡고 노예로 끌고 들어갔다.

인간의 완고한 탐욕 앞에서 하나님의 안식은 역설적이게도 바벨론의 칼날과 성전의 파괴라는 쓰라린 심판을 통과해서야 땅 위에 내려앉았다. 온 나라가 폐허가 되고 백성이 포로로 끌려간 칠십 년 동안에야 비로소 땅이 그 누리지 못한 안식을 강제로 누렸다. 심판을 거치지 않는 안식은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냉혹한 역사 앞에서 하나님이 선언하신 원계약의 뼈대가 서늘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토지의 영구 소유권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신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우리는 이 땅의 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지에 잠시 세 들어 사는 나그네요 거류민일 뿐이다. 나아가 하나님은 인간이 다른 인간의 종으로 팔리는 것을 엄격히 금하시며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들"이라고 못 박으신다. 인간의 자율권과 소유권을 뿌리째 흔들어 오직 하나님의 소유된 종으로 묶어두실 때, 비로소 인간은 다른 인간의 폭압으로부터 벗어난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나팔 소리만 기다리는 비천한 처지에서 하나님의 종이 되고 싶다는 고백은 실로 절박하다. 그러나 내 손에 쥔 땅과 소유권, 내 인생을 내 뜻대로 통제하겠다는 은밀한 자율성을 그대로 움켜쥔 채로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멍에를 온전히 멜 수 없다. 입으로는 거룩한 나그네요 종이라 말하면서도, 뒤돌아서면 여전히 세상의 계산기를 두드리며 내 몫의 안전지대를 악착같이 넓히려는 것이 우리의 정직한 민낯이다. 그러므로 속죄일에 울리는 희년의 뿔나팔은 자기 확신의 노래가 아니라, 파국 앞에서 부서진 자가 토해내는 가난한 탄식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 찢어진 고백을 안고 우리는 소유의 집착을 내려놓은 나그네의 자리에 서서 오늘도 거룩한 나팔 소리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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