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의 죄를 짊어진 거룩과 숫염소의 피 (레위기 16장)

핵심 요약: 레위기 16장은 광야 진영에서 가장 깊숙하고 침묵에 잠긴 장소인 지성소의 휘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일 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 아론은 화려한 판결 흉패와 관을 벗어두고 소박한 흰 세마포 옷을 입은 채 나눔막 안으로 나아갑니다.

레위기 16장은 광야 진영에서 가장 깊숙하고 침묵에 잠긴 장소인 지성소의 휘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일 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 아론은 화려한 판결 흉패와 관을 벗어두고 소박한 흰 세마포 옷을 입은 채 나눔막 안으로 나아갑니다. 아론의 손에는 제단 숯불을 담아 자욱한 향연을 피워 올리는 향로와 방금 잡은 숫염소의 붉은 피가 들려 있습니다. 그 피가 닿아야 하는 자리는 놀랍게도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속죄소 덮개 위와 앞입니다. 본문은 이 장엄하고도 서늘한 의식을 가리켜 "거룩한곳(성소)의 죄를 없애기 위함"이라고 선언합니다. 백성이 진영 곳곳에서 저지른 온갖 반역과 탐욕, 은밀한 부정의 찌꺼기들이 바람을 타고 스며들어 거룩한 성소의 바닥과 기둥을 질식할 듯한 오물로 뒤덮고 있었다는 무거운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책임을 덜어내기 위해 죄의 경중을 나누고 저울질하려 듭니다. 사소한 부주의와 흉악한 범죄 사이에 굵은 선을 긋고 안도하려 하지만, 성막의 렌즈로 비추어 본 죄의 실상은 결코 가볍게 흩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는 개인의 양심 한구석에 남는 얼룩에 그치지 않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이웃이 함께 숨 쉬는 생활 공간의 중심을 오염시키는 치명적인 독극물로 번져나갑니다. 성서에서 죄가 늘 생명의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이 직결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죄가 생명의 온전한 터전을 허물었기에 그 오염을 닦아내는 자리에는 언제나 다른 생명의 고결한 쏟아짐이 요구됩니다. 인간의 탐욕 하나가 성소를 더럽히고, 그 대가로 죄 없는 짐승의 목이 베여 피를 흘려야만 하는 이 엄혹한 제의의 현실 속에서 피조 세계의 깊은 비극과 탄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레위기 16장 16절은 성막을 묘사하며 "그들의 더러움 한가운데 그들과 함께 서 있는 만남의 천막"이라는 기이한 증언을 남깁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백성의 오물을 견디지 못해 성소를 털고 떠나버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거룩함의 훼손을 피해 하늘 보좌의 티 없는 영광 속으로 물러서시는 편이 하나님 편에서는 훨씬 안전하고 온전한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떠나지 않으시고, 그 악취 나는 진영 한복판에 기어이 발을 딛고 머물기를 고집하십니다. 백성의 한복판에 거하시겠다는 태초의 결단, 그 결단 자체가 거룩하신 분이 스스로를 묶으신 거룩한 운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백성의 죄와 함께 망하거나 그 죄를 없애거나 둘 중 하나밖에 남지 않은 벼랑에서 하나님은 성소가 백성의 죄를 고스란히 뒤집어쓰는 수치를 감수하면서까지 죄를 친히 닦아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지성소 덮개 위에 일곱 번 튀겨지는 숫염소의 피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지독한 자기 묶임이자 가장 근원적인 은혜의 시작을 가리킵니다.

광야 성막에서 피로 성소를 닦아내던 이 제의는 마침내 골고다 언덕에서 그 궁극적인 종착지에 도달합니다. 더러움 한가운데 거하시겠다던 하나님의 그 무모한 고집은 마침내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까지 요구받는 자리에 이릅니다. 인간이 스스로 지워낼 수 없는 죄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찢고 거룩한 피를 쏟아내셨습니다. 지성소 덮개에 흩뿌려지던 짐승의 피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흘리실 생명의 피를 향한 예고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피할 길 없는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통하여 당신이 사랑하신 백성의 모든 오염과 반역을 송두리째 집어삼키셨습니다. 진영 한복판에 끝까지 머무시기 위해 아들의 생명을 내어주신 이 사랑 앞에서 성막을 가로막고 있던 나눔막은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고 하나님과 인간을 가르던 죄의 장벽은 허물어졌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은혜를 입에 올리지만, 십자가의 은혜는 결코 안이한 면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숨 쉬는 일상의 공간 한가운데 하나님이 여전히 동행하신다는 사실은 날마다 우리의 허물과 오물을 대신 뒤집어쓰고 계신 하나님의 아픔을 품고 있습니다. 지성소의 피뿌림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마주하는 사람은 단순히 형벌을 면했다는 얄팍한 안도감에 머물 수 없습니다. 나의 사소한 죄악이 하나님의 거처를 더럽혔고, 그 자리를 씻어내기 위해 하늘의 생명이 피를 흘려야 했다는 뼈아픈 부끄러움과 거룩한 전율이 우리 영혼을 뒤흔듭니다. 더러움 한가운데 서서 끝끝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신비로운 사랑을 응시할 때, 우리의 삶은 안일한 종교적 타성을 벗어나 빚진 자의 깊은 경외와 정결한 헌신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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