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머리의 선악과와 되새김질의 거룩: 포식을 멈추는 하나님의 자기 제한 (레위기 11장)
사막의 흙먼지가 가라앉은 저녁,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은 이스라엘 백성의 식탁에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자잘하고 까다로운 목록이 오릅니다. 어떤 짐승은 굽이 갈라졌어도 새김질을 하지 못해 안 되고, 어떤 물고기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어 그릇에 담을 수 없으며, 부정한 사체가 닿은 질그릇은 깨뜨려야 합니다. 고대 위생 수칙이라는 합리적 설명으로 매끄럽게 넘기기에는 44절과 45절에 서슬 퍼렇게 울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너무나 무겁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하루 세 끼 인간의 입과 위장을 가르는 식사 규정 한가운데로 벼락처럼 꽂혔습니다. 하루살이에게 영원을 말하는 듯한 이 기묘한 틈새 앞에서 우리는 숟가락을 든 채 멈칫합니다.
성경의 첫 자리를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왜 거룩의 경계선을 식탁에 세우셨는지 명확해집니다. 인류의 비극이 시작된 자리는 에덴의 식탁이었습니다. 뱀의 속삭임에 홀려 선악과를 보던 아담과 하와는 눈앞의 탐욕에 눈이 멀어 피조물의 경계를 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을 망설임 없이 삼켰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언제나 맹목적인 포식과 맞닿아 있습니다. 내 결핍을 채우려고 타인을 삼키고, 내 배를 불리려고 생명의 질서를 집어삼키며, 스스로 선악의 기준이 되어 경계를 지워버리는 탐욕은 언제나 음식을 씹어 삼키는 입에서부터 터져 나옵니다.
레위기 11장의 정결 규정은 에덴의 식탁을 향한 거룩한 고발이자 복원입니다. 땅의 짐승 중 먹을 수 있는 기준은 오직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입니다. 굽이 갈라졌다는 것은 땅을 딛고 서되 세속의 질서에 묻히지 않는 분별과 거룩한 경계를 뜻합니다. 그리고 되새김질, 곧 삼켰던 것을 다시 게워 올려 씹고 또 씹는 그 둔중한 호흡은 눈앞의 대상을 단숨에 삼키지 않는 영적 멈춤을 뜻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없었던 것이 바로 이 거룩한 되새김질이었습니다. 닥치는 대로 삼켜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포식자의 본능을 꺾고, 하나님의 말씀을 곱씹으며 에덴의 뼈아픈 실패를 반추하는 것, 그것이 광야 이스라엘이 매 끼니 밥상에서 감당해야 했던 거룩의 훈련이었습니다. 레위기 11장이 말하는 거룩이란 음식을 입에 넣기 직전에 손을 멈추고 내가 누구의 경계 안에 서 있는지를 기억하는 거룩한 망설임입니다.
영원 속에 계신 하나님은 시간과 인과율에 매여 허기 앞에 쉽게 굴복하는 인간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가장 낮고 일상적인 자리인 소화기관의 질서 안으로 당신의 거룩을 맞추어 구부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학이 말하는 하나님의 자기 제한(Accommodatio)입니다. 그리고 이 눈물겨운 낮춤은 마침내 골고다와 다락방의 식탁에서 가장 깊은 신비에 이릅니다. 구약의 식탁에서 인간에게 "이것은 먹고 저것은 먹지 말라"며 경계를 그어주시던 주님은 십자가 전날 밤 떡을 떼어 건네시며 놀랍게도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것은 부정한 인간을 삼위일체의 영원한 친교 속으로 끌어안으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의 비천한 밥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방어적으로 물러서 있던 거룩은 마침내 모든 부정을 집어삼켜 생명으로 바꾸는 침투적 사랑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더 이상 돼지고기나 물고기 비늘을 가려내지 않아도 되는 오늘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명령은 폐기되지 않고 도리어 우리의 가장 평범한 일상 속으로 파고듭니다. 오늘 우리의 밥상머리, 우리의 일터와 관계 한가운데 놓인 일상의 선악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욕망을 채우려고 곁에 있는 사람의 인격과 시간을 수단으로 삼켜버리는 탐욕이며,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이웃을 내 잣대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교만의 식욕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타인을 삼켜 더 거대한 포식자가 되라고 부추기지만, 십자가의 식탁에 초대받은 그리스도인은 매일의 자리에서 맹목적인 탐식을 멈추고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김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