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7: 설계도에 갇힌 열정과 케노시스

출애굽기 37: 설계도에 갇힌 열정과 케노시스

"브살렐은 아카시아 나무로... 궤를 만들었다." (출 37:1)

출애굽기 37장을 읽는 것은 인내심을 요하는 일입니다. 앞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시하셨던 설계도와 한 글자도 다르지 않은 내용이 기계적으로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비효율적인 편집 실수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지루한 동어반복이야말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성취한 가장 위대한 영적 승리의 기록입니다.

불과 며칠 전, 그들은 자신들의 금붙이를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뜨거운 열정도 있었고, 금을 다루는 기술도 있었으며, 신을 향한 갈망도 있었습니다. 단 하나 말씀이 없었을 뿐입니다. 37장의 브살렐과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과 똑같은 열정과 기술, 재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폭발적인 에너지를 철저하게 하나님의 설계도 안에 가두었습니다. 자신의 창의성을 죽이고 말씀의 치수에 정확히 복종하는 것, 성경은 이 지겨운 반복을 통해 온전한 순종을 증명해 보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만든 결과물인 언약궤의 재료입니다. 그들은 아카시아 나무를 사용했습니다. 광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나무입니다. 왜 하나님은 웅장한 백향목이나 견고한 돌, 혹은 영롱한 통금이 아닌, 이 볼품없는 나무 속에 거하기를 원하셨을까요?

그 비밀은 무게에 있습니다. 만약 언약궤를 순금 덩어리로 만들었다면, 그것은 너무 무거워 사람이 멜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정착해 군림하는 부동의 신이 되기를 거부하셨습니다. 대신 나무라는 가벼운 소재를 입으심으로써 사람이 어깨에 메고 나를 수 있는 이동식 하나님이 되기를 자처하셨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자기 비움(Kenosis)입니다. 우주를 지으신 분이 고작 두 자 반, 한 자 반의 작은 상자 규격 안으로 자신을 축소하십니다. 그리고 기꺼이 광야의 먼지를 뒤집어쓰며 우리와 함께 걷는 동행자가 되십니다. 다른 신들은 인간에게 "내게로 오라"고 명령하며 높은 보좌에 앉아 있지만,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가겠다" 하셨습니다.

순종이란 무엇입니까? 내 안의 뜨거운 열정을 말씀이라는 차가운 설계도 위에 쏟아붓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기꺼이 작아지셔서 우리 어깨에 메이신 그분의 무게를 감당하며 거친 광야를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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