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모든 경계를 허무는 수직과 수평의 진리 (갈라디아서 2장)
십자가, 모든 경계를 허무는 수직과 수평의 진리
갈라디아서 2장
10 다만, 그들이 우리에게 바란 것은 가난한 사람을 기억해 달라고 한 것인데, 그것은 바로 내가 마음을 다하여 해 오던 일이었습니다. 14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게바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16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1. 진리의 식탁에서 벌어진 영적 위선
안디옥 교회의 식탁은 단순한 식사 자리가 아니었다. 그곳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살아있는 예배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온 이들의 시선을 의식한 베드로가 슬그머니 이방인들과의 식탁에서 물러나는 순간, 그 예배는 무너졌다. 그의 행동은 복음의 진리를 정면으로 배반하는 행위였다. 십자가가 허물어 버린 율법의 담을 교회의 수장인 그가 두려움이라는 벽돌로 다시 쌓아 올린 것이다. 이는 '정무적 판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명백한 영적 위선이었다. 바울이 모든 사람 앞에서 베드로를 책망한 것은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그 식탁 위에는 교회의 본질, 즉 십자가 복음의 진리가 통째로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후퇴는 "복음만으로는 부족하고 유대인의 관습(율법)이라는 알파(α)가 필요하다"는 거짓 복음에 힘을 실어주는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바울은 이 타협이 복음의 심장을 멎게 할 수 있음을 알았기에 물러설 수 없었다.
2. 인간의 열심에서 하나님의 열심으로, 위대한 전복
바울이 베드로의 행동에 이토록 격렬하게 반응한 근거는 16절의 위대한 선언에 담겨있다. 구원은 '율법을 행하는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이것은 단순히 교리를 넘어선 방향의 완전한 전복(顚覆)이다. 율법의 길은 다메섹으로 향하던 청년 사울처럼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한' 처절한 열심의 길이다. 그러나 복음의 길은 그 길 위에서 빛으로 임하신 예수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향한' 무조건적인 은혜의 길이다. 바울 자신이 바로 그 위대한 전복의 산증인이었다. 이때 믿음조차 나의 결단이나 공로가 될 수 있다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내는 완벽한 그릇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구멍이 여기저기 뚫린 방편과 같아서 나의 공로는 모두 새어 나가고 오직 통과하여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남게 하는 통로일 뿐이다. 구원은 나의 믿음의 견고함이 아니라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에 근거한다.
3. 가장 연약한 곳에서 확인된 완전한 일치
이처럼 복음의 진리를 두고 불꽃 튀는 논쟁을 벌였던 바울과 베드로. 이 완벽하지 않은 사도들의 모습은 오히려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복음은 완벽한 메신저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질그릇 같은 이들의 깨어짐을 통해 그 능력이 증명되는 하나님의 이야기(deus dixit, 말씀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사실 베드로를 책망했던 바울조차 늘 원칙만 내세운 강경론자는 아니었다. 그 역시 유대인 선교의 문을 열기 위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고(행 16장), 개인적 서원으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으며(행 18장), 예루살렘에서는 유대인 형제들과의 화합을 위해 기꺼이 정결 예식 비용을 부담했다(행 21장). 이는 바울의 위선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구원의 조건)이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기꺼이 사랑과 연합을 위해 자신을 낮추는 지혜, 즉 그의 '정무적 감각'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처럼 현실 속에서 고뇌하며 때로는 다른 선택을 했던 두 사도가 온전히 유일하게 합의했던 구체적인 실천이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가난한 사람을 기억해 달라는 것"(10절)이었다. 십자가의 진리는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20절) 수직적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진리는 반드시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허물고, 나아가 부자와 가난한 자의 질긴 경계선마저 끊어내는 수평적 사랑으로 확장된다. 어쩌면 교회는 '율법이냐 복음이냐'의 논쟁에 매몰되기보다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이 합의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의 가장 참된 정체성은 완벽한 교리가 아니라 세상의 가장 아픈 곳을 감싸 안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때 비로소 증명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