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길, 그러나 확실한 동행 (요한복음 14장)
알 수 없는 길, 그러나 확실한 동행
요한복음 14장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요한복음 14:4, 새번역)
도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요한복음 14:5, 새번역)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요한복음 14:6, 새번역)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 (요한복음 14:7, 새번역)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4:20, 새번역)
1. 인간의 한계, 역설적 은혜의 출발점
예수님의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는 말씀에 도마는 정직하게 응수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이 도마의 질문은 단순한 무지라기보다 인간 이해의 근원적인 한계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직강을 들었던 제자들조차 그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했으니 시공간을 넘어 성경을 묵상하는 우리야 오죽하겠습니까?
이 제자들의 '몰이해'는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큰 위로와 은혜가 됩니다. 우리의 지적인 능력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그분의 길을 완벽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깨달음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서두의 선언처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모든 것이 계시되어도 우리의 죄성으로 오염된 이해력으로는 그 빛을 온전히 수용할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이 인간의 지적 동의나 완벽한 이해에 앞서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적 이끄심에 달려 있음을 고백하게 합니다. 믿음조차도 우리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는, 예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2. '길, 진리, 생명', 관계적 연합의 선언
도마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선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길, 진리, 생명, 이 세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 전체를 충만하게 설명하는 상호보완적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통로이자 그 길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신실하심과 계시의 실체 그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과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 선언이 향하는 궁극적인 지점은 20절의 말씀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우리가 서로 안에 거하는 내밀한 '관계적 연합'을 의미합니다. 이 '상호내주(Perichoresis)'의 신비야말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셨던 길의 본질입니다.
3. 하나님의 무한 책임, 우리의 수용적 믿음
우리는 자주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을 인간의 의지와 노력을 촉구하는 명령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부르심의 진정한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행위 촉구라기보다 이미 우리를 향해 시작된 하나님의 무한한 열심과 책임에 대한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고 계시기에 우리가 찾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기에 우리가 문을 열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먼저 모든 것을 주고자 하시기에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부재 속에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고독한 투쟁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와 계시고 모든 것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대한 기쁜 응답(response)이며, 그분의 신실하심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능력이 없는 존재이기에, 우리의 기도와 자세는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를 인도하소서.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라는 고백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무기력한 수동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향해 자신을 활짝 여는 가장 깊은 '수용성', 즉 오직 은혜(Sola Gratia)를 향한 가장 능동적인 믿음의 표현입니다.
4. 요한복음과 로마서, 성령 안에서의 깊은 공명
요한복음 14-17장과 로마서 8장은 신약성경의 쌍둥이 봉우리처럼 우뚝 솟아 서로를 비추며 장엄한 신학적 풍경을 이룹니다. 시대적으로 앞선 바울이 요한복음을 읽고 해석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두 텍스트는 마치 한 분의 성령께서 각기 다른 시대와 상황 속에서 동일한 진리를 증언하게 하신 것처럼 놀라운 '공명(Resonance)'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약속하신 보혜사(Paraclete)는 바울에게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치시고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요한이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라는 신비로운 '상호내주'의 관계로 우리를 초대한다면,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라는 선언을 통해 그 연합이 신자의 존재론적 실재가 되었음을 힘주어 증언합니다. 나아가 태초의 말씀(Logos)을 통해 온 우주의 창조와 구원을 선포하는 요한의 우주적 관점은, 만물의 으뜸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을 바라보는 바울의 장엄한 비전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이처럼 요한과 바울은 서로 다른 신학적 언어와 문체로 글을 썼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가져온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온 피조세계의 새로운 관계에 대해 동일한 핵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 저자가 다른 저자에게 영향을 미친 결과가 아니라기보다는 두 위대한 사도와 그들의 공동체가 예수 사건과 성령의 조명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필연적인 영적 공명입니다. 이들의 증언은 서로를 확증하며, 우리가 믿는 진리가 얼마나 깊고 다층적이며 확실한지를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