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골 기질 쩌는 그리스도교 (요 1:1-14)
오늘 설교자는 예배가 성탄캐롤페스티벌과 연계하는 관계로 요한복음 1:1-14을 '일상으로 태어나소서'라는 제목으로 간단히 설교했다.
설교자는 예수가 우리에게 오신 방식에 대한 여러 해석들을 소개했다.
로완 윌리엄스인지 아니면 월터 브루그만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예수는 인간 바꿈이 아니라 인간 됨으로, 군림이나 억압이 아니라 연약하여 의존할 수밖에 없는 아기로,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거저주는 선물로 왔다. 요한복음 편집자는 Logos가 Sarx가 되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당시로는 천지개벽 선언을 했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한국의 안병무 선생은 그리스도가 민중이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의 신학자 돈 큐핏은 21세기에는 하나님이 일상 속으로 오신다고 주장했다.
설교자는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이 되느냐, 혹은 예수의 오심(kenosis)을 인간 구원에만 초점을 맞춰 해석하지 말고, 그것의 방향과 구도를 보자며 설교를 마무리했다.
예나 지금이나 로고스와 육체 사이의 거리는 멀수록 좋다. 이것은 어쩌면 인간의 생득 관념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이 둘 사이를 붙여놓지 않으면 못 견딘다(이단까지 만들면서). 외르크 프라이는 성육신(incarnation)은 당시 상황에서는 혁명적이라고 하면서 이 주장을 전면에 내세운 요한복음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의 인간 되심을 자기 시대에 맞게(im Lebenskontext) 주장해왔다. 인간의 선천적인 흐름을 연어처럼 솟구치며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스도교 사상의 독특성, 매력적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