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예배 (미 6:6-8)
미 6:6-8
온전한 예배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미가 선지자의 말씀이 우리 가슴을 찌를 때, 우리가 경거망동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문제와 사건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을지라도,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해결해야 할지를 잘 판단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어떤 식으로 마주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성격이나 인성, 능력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미가서 6장의 본문을 문제 해결의 관점에서 읽으려고 합니다. 미가서로 곧바로 들어가기 전에 욥기와 창세기에서 볼 수 있는 구도를 먼저 살펴보고 본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욥기와 창세기의 첫 부분의 구도는 서로 비슷합니다.
먼저 욥기를 살펴보면,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을 넘깁니다. 그러자 사탄은 욥 자신과 다른 이들이 보기에 하나님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표식인 재산을 무너뜨립니다. 심지어 욥은 자녀뿐 아니라 아내와의 관계도 끊어지고 맙니다. 이제 욥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느냐?” 욥은 하나님과의 관계마저도 아슬아슬한 처지로 떨어졌습니다. 사탄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일보직전입니다. 사탄이 목표한 것은 욥의 하나님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창세기 초입부에는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아담과 하와가 범하자, 물질(자연)과의 관계도 끊어지고, 아담과 하와 사이도 서로 보듬어주는 관계에서 삿대질하는 관계로 바뀌고 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자 사람 사이도, 사람과 물질 사이도 다 깨지고 맙니다. 욥기와 창세기가 이런 식으로 서로 닮았습니다.
그런데 욥기보다 창조의 시간대부터 시작하는 창세기 문헌이 더 오래되었을 것 같습니다만, 욥기가 창세기보다 오래된 문헌입니다. 욥기는 BC 2,000년 즈음의 이야기이고, 창세기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들 중에 가장 이른 것이 BC 1,000년 정도의 이야기입니다. 욥기가 창세기보다 시간상 앞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소박한 깨달음을 줍니다.
욥기의 이야기는 인생이 경험하는 순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인생은 물질이 사라지고, 사람들과의 관계 -심지어 가족과의 관계도 무너지면 하나님과의 관계마저도 흔들립니다. 인생은 이런 구도와 순서를 연속해서 경험하는 장입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마치 인생을 다 살고 나서 한 마디 남기는 사람처럼 지나온 삶을 고백하는 것처럼 구도가 펼쳐집니다. 반면에 창세기는 살아봤더니 물질이나 사람과의 관계가 깨져서 하나님 관계마저 무너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졌더니 물질이고 사람이고 다 무너지더라며 긴 한숨을 쉬고 있습니다. 우리는 욥기에서 허덕이며 사는 인생의 모습을 봅니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의 인생 말년의 고백을 듣습니다.
욥기와 창세기가 제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신뢰) 문제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신앙생활의 핵심은 하나님을 신뢰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사람은 본능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본문의 미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신뢰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고 평가합니다. 이스라엘은 제사 공동체였습니다. 제사가 성전의 주요 기능이었고, 제사가 어떻게 실행되고 있느냐가 그들 신앙의 주요 척도였습니다. 우리나라 문화도 제사를 특히 강조합니다만, 우리나라의 제사 문화는 조상을 대하는 예의 차원이라면, 이스라엘은 종교 차원이어서 더욱 중요했습니다.
우리는 미가 선지자의 말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다른 말로는 그들의 종교생활을 엿볼 수 있습니다. 미가는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생활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6f.)
이스라엘은 하나님 섬김과 하나님 신뢰라는 문제를 앞에 두고 높으신 하나님을 섬기려고 제사에 무엇을 챙겨갈지를 고민합니다. 제물로 일년 된 송아지를 준비할까? 우리 조상 솔로몬의 일천번제도 있는데 1,000마리 숫양을 준비할까? 아니면 1,000일 동안 양 한 마리씩 잡아 바칠까? 제물을 죽여서 흘러나오는 기름 줄기가 10,000줄기면 될까? 마침내 그들은 내 몸의 소생을 제물로 바치면 하나님을 제대로 신뢰한다는 표현이 될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더 많은 제물, 더 화려한 제사, 심지어 인신제사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미가는 당시 종교생활의 핵심인 제사(예배)를 콕집어 말합니다. 미가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올바른 예배는 이런 예배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8)
미가는 올바른 종교생활, 곧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싶다면, 정의롭게 살고 자비(친절)를 베풀며 살라고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 곧 올바른 제사라고 미가는 외칩니다. 올바른 제사는 천 마리의 양, 천 번의 제사, 만 개의 강을 이룰 만큼의 제물 기름이 아니라고 미가는 선포합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못된 버릇을 보이기 쉽습니다. 정의 실천, 자비를 베푸는 것,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이것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차라리 천 마리의 양, 일만의 기름 줄기가 구체적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올바른 제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마치 어느 율법 선생이, 예수님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자 곧바로 내 이웃이 구체적으로 누구입니까? 라고 반문한 것과 같습니다. 율법 선생이 누가 자신의 이웃인지를 구체적으로 알면 그에게 자비를 베풀고 친절히 대하고 싶어서 예수께 물은 것은 아닙니다. 이웃 사랑과는 상관 없이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습니다. 미가는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이 너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네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사는 날 동안 이웃에게 정의를 실천하고 자비를 베풀며 겸손히 하나님과 걷는 것이 올바른 예배라는 사실은 미가서를 읽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미가는 ‘너희가 이미 다 아는 사실에 대해 또 질문하는 것은 어떻게든 안 하겠다는 표시 아니냐’며 우리를 타이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요, 올바른 예배요, 올바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삶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미가서를 읽으며 다시 한번 마음의 깃을 여밉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