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예수님은 우리를 낭떠러지로 내모실까? (마 5:38-48)
마 5:38-48
왜 예수님은 우리를 낭떠러지로 내모실까?
그리스도인은 낭떠러지에서 예수께 자기 몸을 던져야만 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 그리스도인의 연약함이고 죄성이며 악한 본성입니다. 하지만 그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하십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옛적에 하나님은 계약을 깨버린 이스라엘 백성의 가슴가슴 속에 새 계명을 새겨놓겠다고 하셨고,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으로 그를 온전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신실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의 허물을 걷어내 주시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낭떠러지에 선 그리스도인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38-47절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눈은 눈 이는 이로 갚으라는 것은 세상의 이치 가운데 하나입니다만,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도 세상의 이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공격해 오는 대적자에게 저항하지 말 것은 물론이고, 아예 원수를 사랑하는 데까지 이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복은커녕 대적자에게 다 내어주라고 말씀합니다. 악한 세력과 맞서 싸워도 시원찮은데 대적하지 말고 차라리 사랑하라고 말씀하는 예수님은 이상주의자 아닐까요? 현실세계에서 원수를 사랑하는 사회가 실현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현실세계에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주먹에는 주먹이 득세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는 세상은 주먹이나 칼보다 더욱 잔인하게 법으로써 폭력을 휘두르는 일도 잦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뺨을 한 차례 맞았는데 한 번 더 맞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에게 현실세계가 최소한으로 허용한 정의 마저도 거스르며 살라고 말씀합니다. 경험상 현실세계의 그리스도인은 원수를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이 현실세계에서 원수를 사랑하며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모실까요? 그리스도인이 악에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악은 더욱 힘을 얻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을 내세우며 정의를 실현하려고 하면, 악은 더욱 거센 모습으로 그들을 휘감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상식이나 정의라는 무기로는 악과 싸울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어떻게 악에게 대적하셨는지를 다시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악에게 십자가로써 저항했습니다. 예수님은 악이 내뻗는 주먹을 고스란히 다 맞음으로써 악과 싸웠습니다. 예수님이 내세운 십자가 전략은 얄팍한 처세술이나 공염불이 아니라, 악을 이기는 최선의 무기요 전략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하신 기도를 따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시대에서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늘날도 여전히 ‘너희는 나를 따르되,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명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면, 그는 ‘‘아버지, 나로 하여금 이 십자가를 피하게 하소서.’라고 했던 예수님의 기도를 피할 길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밟으신 단계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비켜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의 귀에는 -예수님이 그랬듯이- 하늘로부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45a). 이 방법 이외에 예수님과 한 몸이 되는 다른 방법은 그리스도인에게 없습니다.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리스도인을 예수님은 피할 길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모십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요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인을 -당신이 십자가로 내몰린 것처럼- 낭떠러지에 서게 하십니다.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인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낭떠러지로 몰아붙이는 예수님을 붙잡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제자도를 말하며 예수님과 제자 사이의 간격을 지적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그리스도인 사이에 간격이 벌어지면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낭떠러지에 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붙들어 그분과 한 몸이 되어야 삽니다.
악이 감당할 수 없는 대상은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나 저항도, 그가 속한 세계의 정의도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수고와 노력이나 능력으로 악을 싸워 이길 수 없다고 토로합니다(롬 7장). 바울처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며 몸부림치는 그리스도인만 악을 대항하는 유일한 방법이자 무기는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진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본 것과 보는 것, 앞으로 볼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악에 저항하며 예수님을 내세우는 순간, 고난은 필수조건이 됩니다. ‘아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십자가에 달릴 수 있느냐고 하면서 눈을 가리고 뺨을 때리며 누가 때렸는지 맞혀 보라’는 조롱을 그리스도인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조롱과 십자가 외에 다른 방법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낭떠러지에 선 그리스도인에게 들려오는 소리, 온전하라.
둘째 부분인 48절입니다. 48절은 본문을 마무리하는 부분으로 “아버지께서 온전하시니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입니다. 낭떠러지로 내몰린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붙잡는다고 할 때, 그가 얼마나 강하게 예수님을 움켜잡아야 저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을까요? 48절이 요구하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온전히 붙잡아 자신과 예수님 사이에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은 낭떠러지에 섰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그에게 내미시는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낭떠러지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건네받은 십자가를 어깨에 멘 그리스도인은 갈팡질팡 혼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붙잡고 싶으나 붙잡을 수 없는 그리스도인, 예수님이 내미는 십자가를 어깨에 덥썩 메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 그리스도인, 그에게 “아버지께서 온전하시니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온전함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십자가를 그에게 건네시는 예수님이 그를 온전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정한 법을 잘 지키고 그분만 섬기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계약이 자꾸만 허물어지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마음에 계명을 새겨주어 지키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다시 약속하십니다.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2-33).
예수님의 법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있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안에서 친히 행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48절의 말씀은 이러한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온전하시니 아버지께서 너희를 온전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온전하시기에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을 온전함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낭떠러지에 선 그리스도인은 악을 대적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는 악과의 싸움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낭떠러지에서 예수께 자기 몸을 던져야만 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 그리스도인의 연약함이고 죄성이며 악한 본성입니다. 하지만 그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하십니다. 하나님이 악을 이기셨고, 세상을 이기셨고, 그리스도인을 이기셨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원수를 대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온전하시니 너희도 온전하라’(48)를 말씀하신 예수께 감사와 찬송을 올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