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4장: 예수 부활 인식에서 외적-내적 3단계

누가복음 24장: 예수 부활 인식에서 외적-내적 3단계


7   '인자는 반드시 죄인의 손에 넘어가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다."
8   여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회상하였다.
11   그러나 사도들에게는 이 말이 어처구니없는 말로 들렸으므로, 그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16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무슨 일입니까?" 그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였습니다.
27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써 놓은 일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셨다.
30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앉으셨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
31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한순간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4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45   그 때에 예수께서는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예수께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예수는 예언자나 정치적 기대를 걸었던 사람이었다. 예수의 부활을 제자들도 믿지 못했다(11절). 여기서 예수의 부활을 거부하는 여러 이유 가운데 제자들의 시신 탈취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예수의 부활 소식을 전달할 때도 3단계를 밟는다. 첫째는 예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의 소식이다. 둘째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통해 그들의 소식을 반복한다. 셋째는 누가 자신이 편지로써 예수의 부활 소식을 전달한다. 누가는 소문의 증폭 효과를 알았던 것 같다. 이것은 일종의 나비효과다. 이것이 예수의 부활 소식을 전달하는 누가의 표면적 3단계다.

내적인 3단계도 있다. 예수 부활 소식은 부활 현현 체험으로 처음 불이 붙여지고, 예수가 하셨던 말씀의 회상을 통해 기름이 끼얹어진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사건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여인들로부터 전해 들은 말을 전달하고 증폭시킨다. 누가는 여기에 하나의 요소를 더하는데, 예수 부활 현현 체험과 예수 말씀 회상을 관장하는 성령의 역사가 그것이다. 나비효과가 나타나려면 사람의 전달과 반복만으로는 안 되고 인식의 눈을 여는 성령의 역사가 필수적으로 더해져야 한다. 성령이 성서와 예수(의 사역)를 연결한다. 예수가 스스로 성서(구약) 전체를 해석했다(27, 44-45절). 27절과 44절은 누가가 고백하는 예수의 정체성이자 성서 해석 방법이다. 누가는 성서를 예수와 연관시키지 않는 해석을 경계한 거다. 어쨌든 예수가 최초의 성서 해석자인 셈이다. 요한이 놓치지 않은 예수의 말씀대로 성령은 예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한다(요 14:26). 그렇게 성령은 예수의 연결(해석) 사역을 이어간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천재 학자 한태동 선생의 자장가 이야기다. 엄마가 아이를 안고 자장가를 부르며 재우고 있다. 이 때 깊은 맛을 내는 자장가가 있다는 거다. 자장가를 부르는 엄마 귀에 제 엄마가 불러주던 자장가가 들릴 때, 아이를 안은 엄마 눈에 자기를 안고 자장가를 불러주던 엄마가 보일 때, 그때의 자장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포근한 자장가다. 그런 자장가를 듣는 아기는 얼마나 단잠을 자겠는가. 악몽도 그 자장가의 깊은 층을 뚫지 못한다. 엄마의 귀에 엄마의 엄마의 자장가를 들리게 하는 것이 누가가 집어넣은 성령의 역사다. 

예수는 성만찬의 제정자이자 최초 실행자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통해 성만찬을 제정한 예수가 스스로 가장 먼저 그 만찬을 재현한다. 그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눈이 열렸다. 이것은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예수의 부활이야말로 예수가 마음의 눈을 열어주실 때 이해할 수 있다고 쓴 거다. 예수의, 예수에 의해, 예수를 위한(그리고 데오빌로를 위한) 눈의 열림이다.이것은 누가의 체험이기도 하다. 여기서 눈이 열리는 시점이 중요하다. 최후의 만찬을 재현할 때, 곧 예수의 말씀을 실행에 옮길 때다(30-31절). 우리가 성만찬을 하는 등 예수의 말씀을 실천할 때 성령이 가까이서 돕는다. 예수가 다가와도 눈이 가려져 있으면 알아채지 못한다. 두 제자의 눈이 열리자 마자 예수의 사라짐은 앞으로 각 사람의 눈을 여는 성령 사역의 모형이다. 불의 혀 같이 각 사람의 머리 위에 내려앉는 방식으로, 마치 등잔에 불을 붙이듯 성령은 활동할 것이다(행 2:3).

예수의 부활은 예수를 만난 자들 혹은 그분의 부활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자들의 체험담의 종합, 그리고 구약의 예언과 예수의 말씀의 연결을 통해 공고해졌다. 한 번 더 질문해보자. 예수의 부활은 언제 깨달아질까? 예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이 제자를 찾아가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여인들의 소식을 한 번 더 전할 때, 그리고 예수가 하라고 했던 성만찬이 실행될 때, 그리고 특히 성서를 예수와 관련지을 때(성경공부) 깨달음이 임했다. 예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누가도 두 번째 편지에서 보이지 않게 활동하는 성령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모습에서 누가와 바울은 비교된다. 누가는 예수 부활의 (경험) 소식이 전달되고 이어지는 면에 초점을 맞춘다면,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설명하려고 든다. 누가는 편지로써 부활의 소식을 전달하고 있고, 바울은 직접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여행을 하면서 동시에 부활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여러 편지를 통해 설명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바울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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