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7장: 그리스도교 신앙의 제 1항목으로서 모든 이를 위한 죄 용서 -누가의 데오빌로 설득 3단계

누가복음 7장: 그리스도교 신앙의 제 1항목으로서 모든 이를 위한 죄 용서 -누가의 데오빌로 설득 3단계


3   그 백부장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 사람들의 장로들을 예수께로 보내어 그에게 청하기를, 와서 자기 종을 낫게 해달라고 하였다.
4   그들이 예수께로 와서, 간곡히 탄원하기를 "그는 선생님에게서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5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우리에게 회당을 지어주었습니다" 하였다.
6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예수께서 백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에, 백부장은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께 이렇게 아뢰게 하였다. "주님, 더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내 집에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7   그래서 내가 주님께로 나아올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셔서, 내 종을 낫게 해주십시오.
9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기시어, 돌아서서, 자기를 따라오는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는, 아직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20   그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우리를 선생님께로 보내어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가서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23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2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36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청하여,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 들어가셔서, 상에 앉으셨다.
37   그런데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었는데,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서 음식을 잡숫고 계신 것을 알고서,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등 뒤에 발 곁에 서더니, 울면서,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랐다.
39   예수를 초대한 바리새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가 누구이며, 어떠한 여자인지 알았을 터인데! 그 여자는 죄인인데!"
48   그리고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 죄가 용서받았다.”


백부장의 종이 병으로 죽음에 가까워졌다. 백부장은 종의 병 치유를 위해 예수께 사람을 보낸다. 그런데, 백부장은 돌연 예수를 집에 모시려고 하지 않는다. 혈육이 아닌 종의 병이라서 백부장이 변심한 것인가? 누가는 그게 아니라 백부장의 신앙적 결단이라고 한다. 백부장의 언행을 동양의 격언에 비유하자면, 그는 자신을 잘 알 뿐만 아니라 상대(예수)를 정확히 알았다(知彼知己). 그는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현실에서 겸손했고, 예수의 병 고치는 능력이 넘지 못할 장애물이 없음을 정확히 알았다. 예수는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그를 칭찬한다. 이것은 누가가 데오빌로를 설득하는 첫 번째 단계의 덫이다. 

누가의 두 번째 단계의 덫은 백부장과 세례 요한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도록 한 것이다. 신앙적으로 고민하는 세례 요한과 신앙적 결단을 보인 로마 사람 백부장의 비교에서 백부장이 세례 요한보다 낫다. 백부장보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더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평가와 완전히 다르다고 하는 28절은 데오빌로를 향한 누가의 최상의 설득이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당신도 여기 등장하는 백부장이 될 수 있다고 부추긴다. 

이제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결정타를 날린다. 사람들에게 죄인이라 불리는 어느 여인이 예수에게 향유를 부었다. 예수가 죄인과 상종한다고 웅성대는 사람들 틈에서 예수는 그 여인에게 죄 용서를 선언한다. 그 장소는 어느 바리새인의 집이었다. 누가는 때와 장소와 등장 인물, 그리고 분위기를 총동원하여 완벽한 하나의 연극 무대를 꾸며 데오빌로를 설득한다. 유대인의 이방인 배척의 핵심인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서, 게다가 그들이 죄인이라 평가하는 남자가 아닌 어느 여인에게 예수가 죄 용서를 선언하는 장면에서 데오빌로는 설득당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의 세 번째 단계의 덫이다. 누가의 디테일이 살아 있지 않은가! 그랬기 때문에 누가는 사도행전으로 남은 두 번째 편지를 데오빌로에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예수의 사역들 가운데 병 고침이 독보적으로 많을까? 고민하는 세례 요한에게 왜 예수는 병자의 치유 사례를 나열하는가? 병자에게 병의 치유는 가장 극적이어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과 구원자로 고백하도록 이끄는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겠으나 좀 더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면으로 접근하자. 질병이 범죄에 대한 하늘의 처벌인 한, 예수는 병자 치유에 전념할 수밖에 없다. 예수는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이다. 병자를 고치고 치유하다 지친 예수는 한 방에 끝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이걸 눈치 챈 사람들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헤파팍스(Hepapax, ein fuer alle mal, 단 한 번에 영원히) 죄 용서 사역으로 보았다. 이 고백의 전통에서 특히 칼 바르트가 대표적이다. 그가 사전처럼 책상 위에 두고 보았다는 <기독교 강요>의 저자 칼뱅의 이중 예정 주장도 어쩌면 하나님의 전능에 기인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고려해서 나온 결과물일 수 있다. 중도 탈락의 대표격인 사울 왕이나 가룟 유다의 케이스가 일상인 우리네 현실에서 하나님의 전능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상처나지 않으려면, 사울이나 가룟 유다의 낙마를 하나님의 절대 예정이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칼뱅은 자기 지식과 논리를 총동원해서 -시쳇말로 머리를 많이 써서- 하나님도 예수도 다 살려냈다. 칼뱅의 논리를 따르든, 또 다른 이의 주장에 마음을 두든, 성서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에 대한 예수의 용서 선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절대 항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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