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장: 복의 선언과 안식일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전하고 싶은 예수의 마음

누가복음 6장: 복의 선언과 안식일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전하고 싶은 예수의 마음

1   한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
2   그러자 몇몇 바리새파 사람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당신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시는데, 거기에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예수가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지 엿보고 있었다.
46   어찌하여 너희는 나더러 '주님, 주님!' 하면서도, 내가 말하는 것은 행하지 않느냐?

베드로를 전면에 내세우고 나서 누가는 예수의 병 고침들 가운데 안식일에 일으킨 사역을 주로 다룬다. 왜 누가는 베드로의 3단계 기적을 소개한 다음 안식일의 논쟁과 치유 사건을 배치했을까? 누가는 율법 가운데 핵심은 십계명이고, 그 가운데 중점은 1계명이 아니라 4계명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십계명의 1계명(넓게는 3계명까지)이 하나님을 향한 피조물의 올바른 태도라면, 4계명은 하나님의 뜻을 적시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과 안식하기를 원한다. 어느 신학자는 안식일을 창조 사건과 연결하여 하나님과 피조물의 창조의 일곱째 날 잔치로 해석했다. 마태도 예수의 공생애 초기에 산상복음을 배치했다 (마 5장). 마가는 안식일의 손 마른 사람을 고친 사건을 십자가의 죽음과 연결했다 (막 3장). 마가는 기득권층이 예수를 십자가로 내몬 실제 이유와 그들이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십자가의 신앙적 의미를 손잡게 한 것이다. 이를 통해 마가는 기득권이 종교적으로 중요시하는 안식일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누가는 6장에서 안식일에 벌어진 논쟁(밀 이삭 먹은 것)과 치유 사역(손 마른 사람을 치유)을 연거푸 제시하며 마가보다 더욱 안식일을 강조한다. 그런 다음 누가는 예수의 산상복음, 곧 복 선언(의 배치)을 통해 안식일의 치유와 해방은 하나님의 뜻임을 밝히 드러낸다. 누가가 바라보는 예수는 하나님을 잘 섬기라고 말씀하지 않고 그분이 베푸시는 은혜를 말씀한다. 누군가 예수께 질문했을 때를 제외하면, 예수는 단 한 번도 직선적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복음서들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의 은혜를 직접적으로 말씀했다. 그분은 내가 죄인이라고 털썩 주저앉는 이에게 마음 편히 돌아가서 잘 살라고 말씀했다. 안식일의 치유와 그날을 위해 사람이 만든 법으로부터 해방은 예수의 복의 선언과 일직선 위에 있다. 세대를 초월하여 안식일법에 매인 이들에게 예수는 반문한다: “어찌하여 너희는 나더러 '주님, 주님!' 하면서도, 내가 말하는 것은 행하지 않느냐?” (46절)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어도 괜찮다고 하고 당연히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예수는 이 사건을 구실로 자신을 십자가로 내몬 이들을 용서하실까?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은혜로운 말을 내뱉는다. 나 같은 죄인의 구원이 문제가 될 때 십자가는 무한한 능력의 은혜이다. 그러나 예수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과 우리가 유대인에 빙의된 채 금 긋는 이방인들에게 십자가의 능력은 여전히 유효한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회개라는 개념을 소환하여 난처한 질문에 답하려고도 하지만 실제로 나의 회개 때문에 내게 구원이 임했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절대 그런 말을 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부르심(창 12장)과 할례(창 17장)의 시간차가 좋은 예다. 창세기를 유심히 살핀 바울도 로마서 4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를 강조했다. 어느 설교자는 아브라함의 할례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시간차가 20년도 넘는다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다. 예수는 오늘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에게 묻는다: ‘너는 내게 주님, 주님 하는데,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느냐?’ 예수의 질문을 바꾸면 이렇다: ‘너는 십계명의 제 4계명을 지키느냐?’ 우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을 지킨답시고 ‘주일성수’ 카드를 꺼내든다. 맞다, 주일을 성수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예수 당시에도 이것이 문제가 되어 답답해 하던 예수는 기어이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만들어 신앙 행태를 한탄했다. 예수는 아직도 안식일 논쟁을 벌이고 있고, 여전히 안식일에 그리스도인의 난치병을 치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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