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5장: 죽기로 작정한 예수-마태복음 편집자의 탄식

마태복음 25장: 죽기로 작정한 예수-마태복음 편집자의 탄식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불은 가졌으나, 기름은 갖고 있지 않았다.

15   그는 각 사람의 능력을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45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을 이전 장들과 연계하여 읽는다면, 25장의 열 처녀, 달란트, 양과 염소 비유는 율법학자와 바리새파가 들어야 한다. 세 개의 비유는 그들이 위선자인 이유를 가리키는데, 달란트 비유부터 읽으면 그 의미가 보다 선명해진다. 

우선 달란트가 다섯이냐 둘이냐 하나냐에 매이면 달란트 비유는 숨어버린다. 숫자보다 종의 행위를 주목해야 달란트 비유는 살아 남는다. 하늘 나라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하늘 나라를 비유한 달란트는 우리의 눈에 안 보인다. 다섯 둘 하나는 땅의 기준일 뿐이다. 어쨌든 예수는 율법학자와 바리새파를 가리키며 한 달란트 받은 종이라 평가했다. 그런데, 그들의 종교적 행위는 한계 그 이상이었다. 그들은 늘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었다. 왜 예수는 우리의 계산과는 달리 그들을 한 달란트 받은 종이라고 했을까? 

양과 염소의 비유는 예수가 그들을 그렇게 평가한 이유이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양의 편에 선 사람이다. 그들은 제가 언제 달란트를 남겼느냐고 하며 주인의 결산 방식에 놀란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하며 살았을 뿐, 드러나게 선한 일을 한 적도 악한 일을 한 적도 없다. 그들은 다만 이심전심, 십시일반을 당연히 여기며 살았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염소 편으로 갈렸다. 그들이 제출한 달란트 결산서에는 성과가 빼곡히 적혀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언제 주님을 안 돌본 적이 있느냐고 당황한다. 양과 염소의 반응은 똑같은데 예수의 평가는 다르다. 주인은 복음서의 다른 장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예수는 제출된 결산서의 금액이 아니라 종의 행위에 기준을 둔다. 염소 편에 선 사람들과 달리 양의 편에 선 사람들은 결산서에 뭔가 넣고 싶어도 쓸 것이 없다. 이웃에게 차 한 잔 대접한 것을 결산서에 적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들은 하찮은 일이고 일상의 일이기 때문이다. 

한 달란트 받은 종, 염소 편이라고 평가 받은 사람들은 어리석은 신부들이다. 등불을 들어야 한다면 당연히 등잔에 기름을 채워야 한다.누구에게나 달란트와 등잔은 주어졌다. 화려한 등잔이든 소박한 등잔이든 기름을 채워야 불을 밝힐 수 있다. 화려한 등잔 준비가 우리의 셈법이라면, 하늘의 셈법은 등잔이 빛을 냈느냐에 있다. 불을 밝힐 수 있는 등잔을 든 신부는 슬기롭다. 

마태복음 편집자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예고보다 이 자료를 배치하며 탄식했을지도 모른다. 예수가 기득권층(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을 지혜롭지 못한 다섯 신부, 한 달란트 받은 종, 염소라고 했으니 그들이 그분을 가만히 놔둘 리 없다. 예수는 죽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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