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의 슬픔과 선택 (렘 1:4-10)

렘 1:4-10
예레미야의 슬픔과 선택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레미야의 삶을 알아버린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압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그가 눈물 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한 번도 칭송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는 환호보다 욕설을 들어야 했고 매를 맞았습니다. 그는 구덩이에 던짐을 당하고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예레미야는 동족에게 체포되어 애굽으로 끌려 갔으며, 그 이후 그의 삶의 여정은 분명치 않습니다. 그의 인생이 참으로 서글픕니다. 그래서인지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슬프다”고 호소합니다. 예레미야는 본문에서 네 차례나 “슬프도소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예레미야의 슬픔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1장 6절의 ‘슬프도소이다’입니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이 구절은 예레미야가 겸손해서 자신은 물불 가릴 줄 모르는 아이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자신이 아직 선지자로서 공적 활동을 시작할 나이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뭔가 깨달았을 때 한결같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주님을 따를 뿐 아니라 죽는 데까지도 함께 가겠다고 큰소리를 칠 때, 그들은 주님을 모른다고 하거나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모세도 동족을 위해 쓰임을 받고 싶었을 때는 하나님이 그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 자신은 말이 어눌하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재목이 아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참 선지자는 하나님이 가까이 오실 때 피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의 일이 고난의 길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는 그럴 인재가 못된다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1장 6절의 예레미야의 슬픔은 왜 하필이면 나 같은 사람을 선지자로 세우려고 하십니까? 라는 그의 고통스런 말입니다. 예레미야가 겸손한 체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못하겠다는 자기 고백입니다. 

둘째는 4장 10절의 “슬프도소이다” 입니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진실로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크게 속이셨나이다 이르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리라 하시더니 칼이 생명에 이르렀나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따지듯 묻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정말 평강을 말씀하신 것이 맞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면 꼬리가 아니라 머리가 되어야 하고, 못해도 중간은 가야하며, 험한 세상 풍파 속에서도 평강이 찾아와야 할 텐데, 칼이 목에까지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샬롬이 현실적으로 거짓 아니냐는 것입니다. 유다 사람 누구에게서도, 지금 유다의 어떤 상황에서도 평강이 보이지 않는다는 항변입니다. 이 구절은 정말로 택하신 백성을 이대로 버리실 것이냐는 예레미야의 애달픈 탄원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유다의 형편을 한번 보시라고 하면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14장 13절의 “슬프도소이다” 입니다. 

이에 내가 말하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리라 하나이다 

다른 선지자들은 기근이 닥치지 않을 것이고, 절대로 칼이 목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이 확실한 평강을 주실 것을 한목소리로 예언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만은 그렇게 예언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평강을 선포하는 대신에 유다의 뽑힘과 파괴와 파멸, 그리고 넘어짐을 선포해야 합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유다 백성들의 선민의식은 견고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두 가지 면에서 확고했습니다. 우선 그들은 다윗 왕가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를 굳게 믿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다윗의 통치가 영원히 이어질 것을 확신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은 절대 무너지지 않고 영원할 것을 그들은 굳게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계시기에 그 성전은 절대 무너질 수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선민의식은 종교적 아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라면 두렵고 떨림으로 선민의식을 유지해야 할터인데 그들은 선민의식만 되새겼을 뿐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진실한 마음으로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다윗왕과 예루살렘 성전을 붙잡았습니다. 알맹이가 아니라 껍데기만 잡은 꼴이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의 그런 모습이 슬펐습니다. 

마지막으로 32장 17절의 “슬프도소이다” 입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32장 6절부터 살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사촌 하나멜의 밭을 억지로 삽니다. 그것도 매매증서를 공증까지 해서 매매를 공식화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그때까지 나라가 망한다고 예언해온 것이 문제입니다. 곧 망할 나라인데 예레미야가 무슨 좋은 것을 기대하여 땅을 구입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32장 15절에서 예레미야가 땅을 산 것은 나중에 유다가 회복될 것을 가리키는 징표라고 합니다만, 32장 17절의 그의 기도에는 서글픈 한숨이 섞여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천지도 창조하셨으니 못하실 일이 없으니 하나멜의 밭을 사라고 하신 것이지 않겠느냐는 자조 섞인 기도입니다. 안 그래도 자신의 예언 때문에 욕이나 듣고 매를 맞아서 슬픈데, 곧 망할 나라의 땅까지 사라고 하니 슬픔이 극에 달한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빈정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레미야에게서 가장 슬프고 가슴이 아린 대목은 본문 8절입니다.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본문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는 대목입니다. 그가 소명을 받을 때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힘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언한다고 입만 떼면 욕이 날아오고, 가족마저도 등지고, 하나님이 결혼도 못하게 막고, 재미는커녕 살기 어린 시선과 곤욕만 가득차 올 때, 예레미야는 고민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내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대체 내게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것일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하리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그는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너희가 관원 앞에 설 때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니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사실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는 때리는 매를 다 맞아야 했고, 구덩이에 던져지기도 했고, 옥에 갇혔고, 백성들은 물론이고 가족에게서도 욕을 봐야 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애굽에서 객사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아니 우리를 모태에 짓기 전부터 선택하여 세웠다면, 매 맞을 자리라도 피할 수 있어야 하고, 혹시라도 매를 맞아도 아프지 않아야 하고, 눈물보다는 의연할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예레미야가 애굽에서 객사한 것이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니 두려워 말라는 말씀의 실현일까요? 예레미야의 일생을 이미 아는 우리는 그가 정녕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했는지가 궁금합니다. 그가 욕먹는 것이나 매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했습니까? 아니면 애굽에서 객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서 하루라도 속시원하게 산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왜 이런 슬픔을 주시나 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아파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옛날 예레미야도 슬프고 오늘날 우리도 슬픕니다. 

우리는 갈림길에 섭니다. 여운형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나중에 사회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분이 원래는 기독교인이었고 매서인이었습니다. 승동교회에서 소사(전도사)직도 감당했습니다. 그러니까 여운형 선생은 기독교인이다가 사회주의자가 된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가 있던 건물의 4호실이 임정 사무실이고, 그곳은 2호실을 통해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2호실 다락방에 여운형 선생이 두 아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어느 날 2호실에 불이 나서 여운형 선생의 두 아들이 타 죽었습니다. 선생은 “뭐, 하나님? 야 관둬라”하고 뒤집어졌습니다. 그 사건 이후 선생은 좌익으로 넘어갔다고 합니다. 

우리가 실제 여운형 선생의 상황에 처하면, 우리라고 “하나님? 다 그만두자.” 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레미야의 처지에 빠지면 우리 입에서 하나님을 부정하고 저주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레미야가 그랬듯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서로 이가 잘 안 맞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신뢰한다고 쉽게 말하지 못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가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하나님의 선민임에도 파멸 당해야 함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대로 예언했더니 백성들이 회개는 커녕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나라를 생각해도, 자신을 돌아봐도 슬플 수밖에 없었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의 생애 마지막이 아름답지 않음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 앞에 여운형의 선택과 예레미야의 선택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처럼 하나님께 하소연도 해보고, 울기도 하고, 빈정대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눈물의 하소연과 투정의 대상은 언제나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우리를 슬프게 해도, 하늘이 더없이 파랗게 보일 만큼 행복하게 해도, 우리가 흘리는 서러운 눈물의 대상, 우리의 감사의 대상은 오직 한 분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그의 찬양과 감사, 그리고 서러운 눈물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을 다 알아서 하나님을 선택하고, 그분과의 동행길에 나서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입니다. 여운형 선생의 길이 궁극적으로 파국의 길인지 아닌지도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삶을 알아버린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압니다. 우리가 선택의 상황에 몰릴 때, 당신의 자녀인 우리의 길이 서럽든지 행복하든지 하나님이 함께 걸어주시길 빕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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