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욕망과 하나님의 복 (창 12:1-3)

사람의 욕망과 하나님의 복
창 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날을 기대합시다. 
비록 우리의 신앙이 사인파 곡선(sine wave)을 그리고 있지만, 하나님과 함께 길을 떠납시다. 
비록 사람의 욕망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기다립시다. 
아브라함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시선


창세기의 전반부에는 드라마 같은 굴곡이 있습니다. 높아진다 싶으면 추락하고, 그 추락하는 속도도 빠르며, 그 깊이도 깊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후 피조물들을 바라보시며 흐뭇해 하셨습니다(창 2장). 하지만 하나님의 미소가 채 가시기도 전에 사람의 타락이 나옵니다(창 3장). 곧바로 가인과 아벨 형제 사이에 살인사건이 이어집니다(창 4장).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아벨 대신에 셋을 주시며 위로하심에서 따스함과 평안이 이어지는가 싶다가도(창 4-5장) 곧이어 노아 홍수 이야기가 나옵니다(창 6장).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여자를 아내로 맞습니다. 이것을 보신 하나님은 한 편으로는 내 영이 더는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노아 가족을 살리시는 장면에서 우리는 안도하다가도, 노아의 후손들이 바벨탑을 쌓는 장면에서 다시 긴장하게 됩니다(창 11장).

이렇게 창세기 전반부에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행하신 일과 사람이 하나님께 행한 일이 번갈아 대조되어 나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새 아들을 주시고, 기회를 주시고, 살려주시는데, 사람은 하나님께 올바른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 사인파(sine wave) 같은 곡선이 반복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계속 읽어가도 이후 벌어지는 인간의 역사는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내용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창세기 1-11장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간의 악함이라는 구조는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편집자가 어쩌면 성경 첫째 권의 첫 부분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상반된 행동을 예언처럼 못 박아 놓은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창조 때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복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이 너무 좋아 보여서 흐뭇하셨기 때문입니다. 우여곡절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 와서 또다시 복을 말씀하십니다. 본문에 복 이야기가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사람에게 복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시선 같습니다.

바벨탑, 사람의 욕망


그러나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께 등을 돌립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복을 보다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보다 눈앞에 당장 필요한 것들, 짧은 인생을 마칠 때 다 내려놓고 가야 할 것들을 선호합니다. 사람이 욕망한 복의 최정점에 바벨탑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가지 금붙이로 금송아지를 만들듯이 사람의 욕망을 모두 모아 불에 던져넣으면 바벨탑이 튀어나옵니다. 
창세기 11장은 사람의 욕망의 마지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3절) 

오늘날의 바벨탑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쌓아 올리고 있습니까? 성공해야만 행복해진다는 신념으로 돈, 명예, 학벌이라는 벽돌로 자기의 꿈을 높게 쌓아 올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온갖 지혜를 다하여 쌓고 있는 탑이 무너지지 않도록 역청을 바릅니다. 

하나님의 대답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쌓아 올린 바벨탑에 오르지 못합니다. 자신의 욕망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사람에게 주시려는 복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의 욕망이 마지막 선을 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욕망을 쌓아 올리던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허무함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의 축소판이 창세기 1-11장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행동하심, 곧 사람의 욕망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복이 나올 차례입니다. 
어느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십니다. 

아브람아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창대하게 되고, 복 자체가 된다는 것이 두드러져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마침내 복 자체가 되어서 모든 사람과 민족이 그를 통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신다고 하니 좋긴 한데, 이 약속의 말씀의 이전 상황을 보면 기가 질립니다. 하나님은 배신의 상처를 입지 않는 분 같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사람에게 복을 말합니다. 그에 대해 사람은 배신으로 답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에게 다시 복을 말씀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무감각한 분은 아닙니다. 노아 홍수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내가 이제는 너희와 함께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는 대목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 때문에 깊은 상처를 받으셨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사람에게 다시, 또 다시 복 이야기를 하실까요? 하나님은 사람에게 복을 주지 못해 좌불안석이실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창대하게 되고, 복 자체가 되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아 올리며 서로 다짐하듯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

그러나 하나님은 바벨탑으로 자신들의 욕망의 끝을 보려는 사람에게 정확하게 맞서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사람들의 욕망을 훨씬 뛰어 넘는 복을 약속하십니다. 첫째로 사람이 ‘성읍을 건설하고 탑을 세워 흩어짐을 면하자’고 욕망을 표출하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하면서 사람의 욕망에 맞서십니다. 둘째로 ‘탑을 쌓되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는 사람의 욕망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해주겠다’고 맞서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성읍, 곧 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많은 희생이 따릅니다. 여러 사람의 수고와 땀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지배와 피지배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명령하는 사람 따로 있고, 일하는 사람 따로 있게 됩니다. 이러한 욕망에 찌든 인간의 계획에 맞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천하 만민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람보다 더 복을 생각하는 장면입니다. 

사람의 욕망 끝에 계신 하나님


하지만 하나님이 베푸는 복과 인간이 욕망하는 복을 구분해야 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이 인간의 꿈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사람이 꿈을 꾸면, 그 과정에서 희생해야 할 것도, 잃을 것도 많고, 치루어야 할 대가가 얼마인지 가늠조차 어렵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배제하면 당장은 편한 것 같아도 수고하고 애쓰다가 곤고하게 됩니다. 설령 욕망이 이루졌다 하더라도, 그 기쁨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사람의 꿈은 욕망으로 흐르기 십상이지만,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을 꿈꾸면, 그것은 야망이 아니라 비전이 됩니다. 사람이 흩어짐을 면하고 큰 민족을 이루자고 욕망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하셔야 합니다. 사람이 우리 이름을 내자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너희의 이름을 창대하게 만들겠다고 말씀하셔야 합니다. 

사람의 욕망의 끝에 하나님이 서 계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특별한 존재여서 그를 찾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그를 찾아 오시기 전에는 사람의 욕망대로 살아가던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자기의 방식대로 욕망을 좇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복된 길을 걸으려느냐? 
익숙한 너의 욕망으로부터 떠나 내가 주는 복을 받으려느냐?
네가 노력하고, 네가 경쟁하고, 
네가 쌓아 올려야만 되는 그 세계를 떠나, 
내가 너의 이름을 세워주는 그 세계로 들어오려느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장면은 인간 욕망의 끝인 바벨탑의 허무함을 넘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때 하나님은 복을 들고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들은 하나님의 초대는 이런 것입니다. 큰 민족을 이루게 할테니 지금까지 너의 욕망을 쌓아 올린 땅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익숙함이 좋을 나이에 낯선 세계로 나와 함께 떠나자는 하나님의 초대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현실은 큰 민족을 이룰 첫 단추도 꿰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방식은 늘 이런 것 같습니다. 사람이 이룬 것에서 떠나 하나님과 함께 길을 나서자는 것 말입니다.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께 찾아와 영생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너의 익숙한 것에서 떠나서 나와 함께 길을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본토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갔음에도 기근부터 만나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복을 사람에게 주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을 찾아가신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의 욕망의 끝으로 찾아오실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복, 우리로 하여금 허무하게 만들지 않을 복을 갖고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날을 기대합시다. 비록 우리의 신앙이 사인파 곡선을 그리고 있지만, 하나님과 함께 길을 떠납시다. 비록 사람의 욕망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믿음으로 기다립시다. 아브라함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사(Sacramentum, 성례)

책임의 원칙 (요 20:19-31)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통해 영원하게 인식되는 인생 (마 3: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