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장: 예수의 가르침의 권위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7장: 예수의 가르침의 권위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11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니, 무리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29   예수께서는 그들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율법 해석)에 놀랐다. 사람들은 율법 해석과 적용에서 율법학자들과 예수가 다르다고 느꼈다.  그들이 왜 놀랐을까? 편집자는 그들이 논란 이유를 ‘권위’로 보았다. 어떤 점에서 사람들과 편집자는 예수의 가르침에 권위가 있다고 보았을까? 

산상수훈/복음에서 예수는 기존 율법 조항보다 거칠게 해석한다. 예수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법을 이렇게 해석한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 겉옷도 내어주라. 너의 비판자(원수)를 심판하지 말라. 율법에 대한 예수의 강한 해석 때문에 사람들이 놀랐을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몰아부치는 해석에 놀랄 수는 있으나 감동할 수는 없을 뿐더러 권위를 느끼기는 어렵다. 

예수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는 시간이 요구된다. 일차 반응인 놀라움은 신속하고 동시적이다. 사람들은 이미 예수 가까이에 모였기에 그들의 귀는 예수의 말씀과 동시에 반응할 수 있다. 그렇다고 놀라움의 극치가 권위는 아니다. 권위는 이차 반응이다. 이차 반응인 권위는 예수의 비유처럼 열매를 맺을 시간이 필요하다. 무화과나무를 심자마자 무화과를 얻을 수는 없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단 번에 권위를 느꼈다는 것은 놀라움의 최대치일 뿐이다. 예수의 권위는 그의 전생애가 맺은 열매로 주어진다. 

예수가 맺은 열매는 ‘십자가와 부활’ 아닌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그분의 산 위에서의 가르침을 기존의 윤리 규정, 곧 사람을 구석으로 몰아대는 교훈이 아니라 복음으로 만든다. 산상수훈이 산상복음으로 들리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분 가르침의 권위는 발생한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빛에서 그분의 언행을 해석한 결과물이 복음서들 아니던가! 마태복음 편집자는 예수의 가르침들에서 하나님의 본심을 발견했다. 11절이 그것이다. 동태복수법을 뛰어넘으라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사람들과 편집자는 자신들의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런 한계상황에 다다른 이들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 예수의 일생을 관통하는 ‘십자가와 부활’은 그분의 가르침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본심을 발견하도록 만들었으며 동시에 예수의 가르침을 되새김질 할 때 권위를 느끼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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