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의 실제 (행 20:22-24; 21:1-6)
신앙생활의 실제
행 20:22-24; 21:1-6
22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1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4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5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바울은 로마와 서바나(스페인)에 가서 전도하려고 급히 예루살렘으로 간다.
성령은 그가 거기서 체포될 것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바울은 자신의 발길을 딴 곳으로 돌리지 않는다.
그만큼 그의 신앙의 열정은 뜨거웠고, 그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과 선지자가 그를 막아선다.
그들도 자신들의 의사가 아닌 성령의 지시를 받고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막은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성령의 참된 지시인가?
성령의 지시가 분명하지 않을 때 좀 더 기다려도 절대 늦거나 잘못되지 않는다.
바울은 모든 것이 분명해질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다.
신앙생활의 실제는 기다림이 미덕인 경우가 더 많다.
영화 같은 바울의 선교여행
사도행전은 12장까지 베드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13장부터는 바울의 선교여행이 시작됩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인 28장에는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하기 직전까지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선교여행은 대단합니다. 바울의 선교여행이 극적인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가던 바울이 예수를 전파하는 사람이 되어 선교여행을 다닌 겁니다. 그리스도인을 잡으러 다니던 사울의 발걸음이 그리스도를 전하는 발걸음으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빗대어 말하면, 바울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것입니다.
바울의 선교여행이 드라마 같은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선교여행을 세 번이나 다닌 것입니다. 바울은 한 번도 어려운 선교여행을 세 번이나 다녔을 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마게도냐, 지금의 그리스까지 갔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모습에서 그의 선교 집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완전히 매료되지 않고서는 그렇게 변할 수 없었을 겁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복음을 선포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그가 미쳤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너의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행 26:24)라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시쳇말로 미친 듯이 선교여행을 다녔습니다. 우리는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바울의 신앙을 보며 감동합니다. 그의 신앙의 모습은 신앙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는 때로 바울처럼 그렇게 결단하고 각오하는 신앙을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의 열망
바울은 세 번째 전도여행을 하며 에베소에서 3년 정도 체류합니다. 그는 날마다 두란노서원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로마와 땅 끝인 서바나(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행 19:21)
바울은 에베소에서 출발해 바다 건너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살핀 후 신속하게 예루살렘으로 가서 다시 로마와 서바나로 파송 받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의 가슴은 하루라도 빨리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로마와 서바나로 파송 받아 거기에도 복음을 전하려는 열망으로 부풀어 올랐습니다. 바울은 왜 그토록 로마와 서바나로 가고 싶었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세 가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강렬한 체험 때문입니다. 그는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거기서 180도로 바뀌어서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둘째는 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다 마쳤으니 이제 로마와 땅 끝이라 일컫는 서바나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바울의 열망입니다.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롬 15:23). 여기서 ‘너희’는 바로 로마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을 잡아들이는 전사에서 사람이 완전히 변화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된 바울의 열정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셋째는 성령께서 바울을 충동질했기 때문입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행 20:22-23). 이처럼 성령이 예루살렘으로 사도 바울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로마와 서바나(스페인)로 다시 파송을 받고 싶었습니다.
로마서 1장이나 데살로니가전서 2장은 바울이 로마로 가고 싶어 했으나 사탄이 여러 차례 그 길을 막았다고 합니다. 그는 로마에 가서도 복음을 전하고 싶지만 사탄이 자신의 길을 막는다는 결론에 이르자 마침내 조바심이 났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면 달갑지 않은 일이 기다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이렇게 다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바울의 마음이 이미 자기 열망으로 굽어 있어서 성령의 말씀이 그에게 스며들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바울의 결기가 섬뜩할 정도입니다.
바울의 예루살렘 길을 막은 사람들
우리가 좀 더 세심히 살피려는 지점은 바울의 결기와는 다르게 그의 예루살렘 행을 막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내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면서 밀레도(지금의 튀르키예 서해안)에서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출발해 두로(팔레스틴 북부 항구)에 도착하자 거기서 제자들이 그를 제지합니다.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행 21:4b).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을 막은 것은 그때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21장 8절 이하에서는 바울이 두로보다 예루살렘이 더욱 가까운 가이사랴에 도착하니까 유대에서 온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바울의 앞을 막습니다.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행 21:10b-12)
아가보가 거짓 선지자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면서 자기의 생각에 빠져 그런 퍼포먼스를 연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번에도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했다”(행 21:13)라고 결기 넘치는 신앙을 고백하며 예루살렘으로 가는 자기의 앞을 막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죽기를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는 바울과 그를 막아서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의아한 부분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로와 가이사랴에서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그의 제자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령이 바울에게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고 하고, 바울의 제자들에게는 바울을 제지하라고 합니다. 성령이 바울에게 하는 말씀이 다르고, 바울의 제자들에게 하는 말씀이 다릅니다.
기다리며 분별하지 못한 바울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데 결기를 보이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갔지만, 그는 성전에서 체포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죽을 지경에 이르자 자기의 로마 시민권을 이용해 황제에게 상소해서 로마로 갑니다. 이것 또한 바울이 로마로 가고 싶은 열정이 빚어낸 사건입니다. 하지만 로마에서 네로는 바울의 목을 벱니다. 결과적으로 바울이 그토록 원했던 로마 선교사역은 반쯤 진행되었고, 그는 그렇게 가고 싶었던 서바나에는 가지 못했습니다.
성령은 두 말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바울이 성령에 매였다고 하면서 예루살렘으로 급히 올라가는 행태는 불타오르는 그의 선교 열정이 일으킨 착시현상 같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로마와 서바나로 다시 파송 받기를 열망했던 바울에게는 자신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막히는 상황을 모두 사탄의 방해로 느껴졌습니다(살전 2:18). 바울은 마음을 차분히 하고 자기가 느끼는 성령과 성령의 감동함을 받은 제자들이 자기 앞을 막는 것을 분별했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성령의 뜻이라고 느껴질수록 바울은 왜 성령이 다르게 말씀하는지를 더욱 정확히 분별하고 움직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조급했습니다.
기다리는 것도 믿음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장면에 빗대어 생각하면, 드로아에서 환상을 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행 16:6-9)
바울은 아시아, 그러니까 지금의 튀르기예 서쪽을 다니며 전도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그를 막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튀르키예 북동쪽으로 가려고 하지만 성령이 그것도 막습니다. 성령은 바울이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마게도냐로 건너가게 하십니다. 그때 바울은 성령의 지시에 순종했습니다.
성령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을 두로에서 막을 때, 아니 적어도 가이사랴에서 제지했을 때라도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옛날 드로아에서 했던 기다림의 자세를 취하지 못한 겁니다. 바울의 선교열정이 그에게 도리어 해가 된 것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로마와 서바나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바울의 열망은 성령의 지시와 기도보다 자기 열정을 앞세우게 했습니다. 사람은 마음이 급해지고 궁해지면 자기의 생각과 열정을 성령의 소리로 잘못 들을 수 있습니다. 특히 사람은 자신이 신앙생활을 착실히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처럼 느낄 때, 얼마나 연약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골고다 행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결과물입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죽기까지 각오한다 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결과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죽기까지 각오한 바울의 열심이 성령의 지시를 따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성령보다 앞서지 않는 것, 기도보다 내가 앞서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의 선교 열정과 각오를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교라 할지라도 자칫하면 거기에 틈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바울이나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바로 그런 틈을 놓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틈을 보이고, 기도보다 앞서고, 성령의 지시인가 싶어 그릇된 판단을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시기에 왼쪽 길을 가야하지만 오른쪽 길을 걸어가도 그 길에서도 우리를 도와주시고 동행해 주십니다. 하지만 기도해서 응답 받은 길, 성령이 지시하신 길을 걷는 것이 더욱 의미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단순 열정보다 기다림의 신앙이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에게는 유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