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7장: 마태복음의 편집자가 제기한 믿음 문제

### 17장: 마태복음의 편집자가 제기한 믿음 문제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명하셨다.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그 광경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10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합니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확실히,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회복시킬 것이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고, 그를 함부로 대하였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13   그제서야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19   그 때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께 다가가서 물었다.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20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복음서는 일기가 아니라 읽을 대상이 있는 글이다. 일기는 글쓴이 자신이 독자라면, 복음서의 대상은 불특정 다수 또는 특정 집단이나 개인이다. 마태복음의 편집자는 17장에서 독자에게 던지는 주제는 믿음이다. 9절과 10절 이하가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는 것은 주제의 중요성으로 말미암은 편집자의 조급함 때문이 아닌가 싶다. 12-13절에서 우리는 편집자가 생각하는 독자를 유추할 수 있다. 이 두 구절은 두 부류의 독자를 염두에 둔다. 하나는 유대교인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예수의 말을 듣는 제자들이 1차 독자라면, 2차 독자는 유대교인과 그리스도인이다. 

유대교인들은 세례 요한을 다시 올 엘리야로 볼 수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화해와 재건을 달성하기 전에 그가 헤롯에게 살해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일을 감당했다고 선언한다. 편집자는 그리스도교인들을 향해 세례 요한이 재림한 엘리야가 맞다고 한 번 더 주장하면서 세례 요한이 배척 당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고난 당하는 모습을 보며 예수를 믿자고 설득한다. 

전통적으로 믿어 왔던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다시 올 엘리야가 세례 요한이냐 아니냐의 문제에서 핵심은 실제로 회복되고 재건되는가다. 편집자는 변화산에서 예수와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자 대표로서 이스라엘 회복과 재건의 주역 엘리야의 만남을 전면에 내세운 후 간질병으로 고통받는 아이의 치유 사건을 배치하면서 독자에게 믿음의 문제를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 정도의 논리로 독자를 설득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래서인지 편집자는 자신의 시도를 겨자씨 만한 설득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어쨌든, 편집자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편집자는 제자들의 기도가 아이의 병을 고치지 못한 이유를 믿음으로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문제를 병고침의 능력 정도로 좁혀서 보아왔다. 우리는 제자들이 겨자씨만한 믿음이 없어서 아이의 병을 고치지 못한 것만 주목하고 말았다. 마태복음의 편집자에게는 세례 요한도 엘리야도 아닌 예수가 중요하다. 그가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예수가 그리스도시다는 믿음이다. 편집자가 제시하는 믿음의 가치와 능력은 겨자씨가 산을 바다에 빠트릴 정도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하다.

한 가지 더 짚을 것은 마태복음에 소개되는 많은 기적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만드는가? 겨자씨보다 더 크게 보이는 기적이라해도 신앙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러니까 우리로부터 배태되지 않은 믿음이다. 겨자씨 크기의 믿음의 씨앗은 우리의 관심 밖이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은 우리 외부에서 주어진, 아니 우리에게 심긴 믿음이다. 예수에 의해, 예수의, 예수를 위해. 편집자는 이것이야말로 산을 바닷물 속으로 옮기는만큼 대단한 기적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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