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2: 충성과 보상을 초월하는 야훼의 넉넉함

시편 132: 충성과 보상을 초월하는 야훼의 넉넉함

14-15절: "이 곳은 영원히 내가 쉴 곳, 이 곳을 내가 원하니, 나는 여기에서 살겠다. 이 성읍에 먹거리를 가득하게 채워 주고, 이 성읍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거리를 넉넉하게 주겠다.

시편 132편을 다윗 왕가의 정통성과 지속 가능성을 바라는 이들의 기도로 보면, 다윗의 충성과 야훼의 보상이 정교하게 짜여있다. 다윗의 충성은 힘과 마음을 다해 야훼를 모실 곳을 마련한 것이고, 그에 대한 야훼의 응답과 보상은 대를 이은 왕위 보장과 가난 극복이다. 양자 사이에 다른 사람(세력)이 끼어들지 못한다. 다윗보다 충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편을 다윗(혹은 그의 후손)과 야훼의 소통의 관점에서 보면, 다윗의 기도(충성)와 야훼의 응답(보상)이 촘촘하게 조직되는 만큼 소통은 보다 더 시원해진다. 

성경에는 사람과 야훼의 소통과 대화가 등장한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 성경을 읽는 나의 실존 상황으로 돌아오면 나와 야훼의 대화가 그리 시원하지 않다. 성경은 소통의 이상을 그럴 듯하게 그려놓은 것인가? 어떤 사건이 반복된다면 확률을 계산할 수 있다. 성경이 담고 있는 야훼와 인간(집단이든 개인이든)의 소통과 실존하는 나와 그분의 소통의 확률이 비슷한가? 혹시 나만의 짝사랑은 아닌가? 이 시편이 야훼의 응답과 보상에 목 말랐기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실존자의 숨 가쁜 호흡에도 불구하고, 야훼 신앙에서 충성의 강도는 양자 사이의 소통의 원활함을 높이지 못한다. 오히려 성경은 야훼의 민감성이 인간의 충성보다 더 본질적임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궁극적으로 야훼의 민감성, 곧 그분의 은혜는 진인사대천명의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을 연장하면, 오직 믿음(이신칭의) 조차 조건이 되는 경우가 잦다. 믿음만큼 힘들고 어려운 행위도 없다. 하나님의 넉넉함은 전제조건이 된 믿음과 행위를 다 덮는다. 하나님의 품이 그만큼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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