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7: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과 씨름합시다.

시편 127: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과 씨름합시다.

1절: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주님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된 일이다.

누가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누가 하나님을 기다리는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한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기다린다. 인간의 노력과 성취, 그리고 열망의 끝에 하나님이 계신다. 함부로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하지 말자. 함부로 하나님을 기다린다고 말하지 말자. 인간의 최선 너머에 하나님이 계신다. 최선을 다 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영역과 존재를 힐끗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표면적으로)의 내부는 두 가지일 수 있다. 하나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하는 이의 하나님 존재 인정이고, 다른 하나는 무턱대고 하나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용서를 비는 것도 마찬가지다. 왜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더 큰가? 이것은 죄의 숫자와 용서의 숫자 비교가 아니다. 죄로부터 벗어나고 싶으나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온 고백의 순도가 죄와 은혜를 비교하게 만든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에서도 마찬가지다. 익숙하게 예수는 그리스도 라고 고백하는 것과 수많은 회의와 좌절로부터 피어난 ‘예수 그리스도’ 고백은 구분되어야 한다. 예수는 반드시 너희의 신앙고백을 구별하겠다고 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이하) 무턱대고, 자동적으로, 익숙하게, 편리하게 하나님을 인정하지 말자. 나의 몸과 마음과 뜻과 영혼을 다하여 하나님과 씨름해야만 하나님의 존재는 올바르게 인정된다. 그래야 소위 제대로 섬길 수 있고 찬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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